주요한(전 부흥부 장관)
부통령 개인 성명서 도맡아
장면 박사와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이 1951년 겨울인가, 부산 임시 수도에서였다. 국무 총리로 임명되어 미국서 귀임한 장 박사를 상공 회의소 주최로 환영하는 석상에서였고, 첫인상이 세련된 신사형이요, 성실한 인격자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마는 비서를 시켜서 전해 오기를 영문으로 한국 정부의 정책 노선과 대미 외교에 관한 각서 형식의 글을 써 보라는 부탁이 있었고, 무어라고 썼는지 지금 기억이 잘 안되나, 하여간 몇 조목 써서 보냈는데 잘되었다고 만족하게 생각한다는 소식을 간접적으로 들었다.
그러나 그 후 부산서는 장 박사와는 다시 접할 기회가 없었고, 1952년 여름 서울 환도 후 나는 경향 신문 논설 위원으로 일보고 있었는데, 그 당시 야인인 장 박사는 역시 경향 신문사 고문이란 이름으로 신문사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만나 뵙게 되고, 때로는 주필인 이관구(李寬求) 씨와 나를 같이 점심 먹자고 하여 삼화(三和) 빌딩 뒤채 2층에서 밥을 먹으면서 정치담을 나눈 일도 있었다. 총리를 사임하게 된 동기라든가, 파리에서의 일화들이며, 초대 주미 대사로 공관을 개설하던 이야기, 승용차가 없어서 고생한 이야기 등을 듣기도 했다.
1954년에 사사 오입 개헌 파동이 있은 후 야당 통합 운동이 일어났을 때 구민주당측에서는 주로 신익희, 조병옥 두 분이 선두에 섰고, 구원내 자유당과 무소속측은 장 박사가 대표 격이었다. 동아 일보사 사장실에서 예비 회합이 있었을 때에 오라고 해서 가 보았고, 약간의 의견을 말하기도 했으나 나 자신은 아직 정당에 가입할 사정이 못 되었으므로 그 후에는 참석하지 아니했었다.
1955년 여름 어느 날 점심때 충무로에 있는 C가(家)라는 데로 곧 와 달라는 전화를 받고 갔더니, 그 자리에는 조병옥, 장면 두 분만이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라고 한 용무는 민주당 결성이 거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갔는데 조봉암을 포섭하느냐 않느냐로 발기인회의 의견이 양립되어 있어, 결정을 지을 수 없으니 네 의견은 어떠냐는 것이었다.
“조 씨가 비록 볼셰비키 노선을 청산했노라고 하지마는, 그들의 그룹은 오랜 습관에 젖어 정치적으로는 수단 방법을 버리지 못할 것이니, 결국 헤게모니 싸움으로 당이 잘되지 않을 것이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때에 어느 분이 먼저 말을 했는지 지금 기억이 안 나지마는 “주(朱)의 판단이 그렇다면 받지 않기로 결정합시다”라고 말씀하였고, 과연 새로 결성된 민주당에는 조봉암이 들지 못했었다.
1956년 대통령 선거 전에 해공 선생이 급서하시고, 장 박사께서 부통령에 당선하실 무렵에는 다시 장 박사를 만날 기회가 없었고, 경향 신문을 통하여 매일같이 여당의 공격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보다 앞서 1954년 나는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종로 갑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실패하고, 4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서울 중구 갑구에서 민주당으로 입후보하기로 결정하고 1957년 여름에 입당 절차를 취했다. 이를 전후에서 순화동 부통령 공관에 거의 칩거하다시피 한 장 박사로부터 가끔 무슨 성명서 등의 초안을 부탁받아 써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런 부탁은 언제나 경향 신문 논설 위원실로 전해 왔던 것이다.
당의 문헌은 선전 부장 조재천 씨가 썼으나, 장 부통령 개인 성명은 주로 내가 만들었던 것이다.
늘 신변에 위협을 느껴
민주당 입당 직후에 나도 원외 당원으로 중앙 상위원에 선임되었는데, 그해 겨울 원내에서는 소위 협상 선거법이 통과되었고 이에 대하여 당론이 양분되었다. 협상 선거법 속에 들어 있는 언론 단속 조문 때문에 통과를 반대한 의원들이 있었고, 조 박사가 반대를 무릅쓰고 찬성했다는 데서 격론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당시에 신문사에 관계하고 있었으므로 그 법의 통과를 반대했고, 상위 석상에서 조 박사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소위 신파 또는 장면파로 지목을 받게 되었다.
구파의 거두인 조 박사는 30년래의 동지요, 일제하에서 감옥에도 가고, 또 신문사를 같이 경영한 일도 있었으나 장 박사를 사귄 지는 4, 5년밖에 안되었던 것이다. 뿐 아니라, 구한민당계에는 오래 사귀어 온 선배와 동료들이 있었고, 사실 신파라는 데 속한 당 간부들은 거의 전부가 초면이었는데, 어느 사이에 신파의 딱지가 붙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주관적으로 양파 대립을 인정하고 싶지도 아니했고 무슨 딱지가 붙는다고 개의치도 아니했다.
1958년 4대 민의원 선거 때에 장면 부통령은 신변을 노리는 자가 있다는 정보로 인해서 찬조 연설에 나서지 않기로 되었고, 조 박사는 남대문 국민 학교에서 열린 개인 연설회에 나와서 찬조 연설을 했었다. 나도 서울 시내 각구에서 신·구파를 가리지 않고 출마자들의 찬조 연설을 위해 분주히 다녔다.
조 박사는 성동 을구에서 출마하였기 때문에 그 구내의 국민 학교에서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찬조 연설을 한 기억이 난다.
4대 민의원 선거 후 당의 기구가 재편되었는데 신·구파의 대립이 심하게 되어, 당내 요직은 철저한 AB식 분배 원칙으로 신임되었다. 그래서 가장 희망자가 적은 정책 위원회 의장이란 자리가 AB 원칙에 따라 신파에 배당이 되어 내가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1958년 여름, 대책 위원회는 소위(小委)를 구성해서 당의 정책을 광범위하게 수정 보완하기로 되었는데 그 소위마저 양파 동수로 구성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실제 작업 과정에 있어서 소위 안에서만은 하등의 파벌적 의견 대립이 없이 화기 애애한 분위기 가운데서 초안을 완성했었다.
이 무렵 당의 간부 회의가 자주 순화동 부통령 공관에서 열렸었다. 그것은 장 부통령의 신변을 노리기 위한 특공대가 조직되었다는 등, 여러 가지 정보가 낭자하기 때문에 당 간부들의 합의로 장 박사가 일보도 공관 밖을 나오지 않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에 대해서 약간 반대 의사를 가지고, 간부들에게 이야기도 해보고 장 박사의 의사도 타진해 보았으나, 지배적인 의견은 만의 하나라도 모험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나의 의사는 통하지 못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고령일 뿐 아니라 건강도 점점 쇠퇴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만일 돌연히 타계하는 일이 있으면 헌법상 부통령이 즉각 계승하게 되어 있으므로 민주당으로서는 장 박사의 신변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소견으로는 그런 우연적인 사태에 대비한다는 것보다도 정치인으로서의 장 박사의 장래를 위해서는 자주 대중 앞에 나서고, 지방 순회도 해서 이미지를 형성해야 할 것이라는 정도론을 표시했던 것이다.
그해 12월 유명한 2·4 보안법 파동이 일어났다. 국회 농성을 자진해서 푸느냐 안 푸느냐 하는 문제로 의견이 대립되었는데, 소위(小委) 구파가 타협을 시도하는 반면에 신파가 옥쇄를 주장한다는 풍설이 돌았고, 조 박사가 국립 의료원에서 이기붕 씨와 면담했다는 설도 돌았다.
파동이 지나간 후 순화동에서 모인 연석 회의(최고 위원과 중견 간부 연석 회의) 석상에서 나는 조 박사를 정면으로 공박한 일이 있다.
“여당과의 타협을 시도하려면 타협의 필요성과 조건을 명시하고 당론의 결정에 따라 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주지였다. 나중에 생각하니 조 박사는 그때부터 이미 다리의 병과 위병으로 고생했던 것 같다. 당시는 이것을 비밀에 부쳤던 것이다. 아직 기억에 남는 것은 조 박사가 커다란 의자에 빠지듯이 앉아서 그 커다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아무 대답도 아니하던 인상이다.
성실한 인품의 광채
장 부통령은 이런 회합에서 별로 발언이 없었다. 그러나 회의가 끝난 후에 사사로이 만나면, 구파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몇몇 간부의 권모적(權某的) 행동을 비평하면서 흥분된 어조로 “어떻게 그런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겠느냐”고 개탄하기도 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장 박사는 수법을 농하는 정치인이기 전에 성실을 지키려는 인간이었다고 생각된다.
4년 간의 칩거 생활을 자의·타의로 부득이 하였던 장 박사는 마음과 몸이 다 같이 피곤하였다. 어느 날 그는 시편 한 장을 펴 보이면서 이 글을 자기의 심경이요, 위안이라고 피력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제27장으로 기억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오.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行惡者)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安然)하리도다. …중략… 여호와께서 환난의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리 지키시고 그 장막의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략…”(이 인용은 신교 성서에 있는 대로니, 천주교 성서의 번역은 좀 다를 줄로 아나 대의는 마찬가지다).
이 무렵 장 박사는 가끔 미국이나 기타 외국 기관으로부터 정치적 의견을 물어 와서 대답을 할 필요가 있고, 그때마다 나는 초안을 영문으로 만들어 드렸다. 그 내용은 대체로 민주당이 집권할 경우의 정책을 묻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경향 신문 시절과 순화동 시절을 통해서(1957-1959) 나는 장 박사의 인간적인 일면에 접할 수가 있었다. 그는 종교인으로서 성실의 원칙을 정치에 적용하려 했다고 생각되며, 소위 정치적인 권도(權道)나 거짓말을 이용하는 일을 거의 생리적으로 배격하는 것이었다.
후일에 역시 단둘이 앉은 자리에서 “민주당을 하느라고 집 두 채를 날려 버렸지마는, 하여간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 소위 정치 자금을 사용하는 일이 가장 양심에 걸린다”고 자탄하기도 하였다.
조 박사가 대통령 입후보를 사퇴한다고 성명했을 때 곽상훈 씨 등이 “이것은 조 박사의 연극이니 운석도 사퇴 성명을 내라”고 권고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장 박사의 대답은 “나는 종교인이니만큼, 한번 사퇴 성명을 내면 아주 그만두는 것이지 연극으로 낼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장 내각 성립 후에 소위 중석 계약 사건으로 시끄러워졌을 때에 상공부 책임자로 있던 나는 “문 사장이 잘못을 저지른 일은 없으나, 정치적 해결을 짓기 위해서 문 사장과 나를 동시에 해임해 달라”고 진언한 일이 있었다. 그때에도 장 박사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왜 해임을 하느냐”고 거부했었다.
세간의 정객들은 이런 태도를 곡해도 하고, 또는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평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를 순수한 의미에서 장 박사의 인품의 광채라고 믿는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 때 조 박사가 급서한 후 나는 장 박사의 부통령 선거 연설을 위해서 대구로 수행했고, 달성 공원에서 대연설회가 열렸었다. 그때의 연설 내용은 장 박사의 정치적 이념, 순박하고도 기본적인 민주주의 사상의 서술이었다.
내가 본 바 대로는 장 박사는 입으로만 아니라 뼛속까지 그러한 민주 사상을 신봉했었고 이것을 거짓없이 실현할 것을 그의 사명으로 삼았었는 줄 안다. 비록 그의 신념은 실현을 보지 못했지마는, 시간이 갈수록 민족적인 동경(憧憬)을 끌어당기는 정치적 고향이 될 것이다.
5·16 전후의 몇 가지 일에 대해서는 다시 기회를 보아 쓰기로 하고 이만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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