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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그 후 4] 나의 스승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그 후 4] 나의 스승들

 

 

 

 
"저 같은 사람은 신부될 자격이 없습니다"
 
 
<사진설명>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신학교에 들어간 나를 거둬 사제로 키워준 고마운 스승들. 왼쪽부터 공베르 신부, 게페르트 신부, 장면 박사.
 
 

 

 

누군가 내게 한 평생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을 묻는다면 '신부가 된 것'을 꼽겠다.
 
소신학교 은사인 공베르(Gombert Antoine, 1875~1950) 신부님 말씀마따나 신부는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게 아니지만 여러 모로 부족한 내가 사제품을 받은 것은 일생 일대의 축복임에 틀림없다.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고 했다. 나도 인생 여정에서 많은 스승을 만났다. 특히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신학교에 들어간 나를 거둬 신부로 길러준 스승들에 대한 고마움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였던 공베르 신부님은 내 흔들리는 성소(聖召)를 지켜주신 분이다. 나는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를 마치고 서울 동성상업학교(소신학교)에 진학했을 때만 해도 사제직에 강한 열망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고 보따리 싸서 고향으로 내려갈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공베르 신부님을 찾아가 "저 같은 사람은 신부될 자격이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나가겠습니다"고 말씀드리자 "신부는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게 아니다"고 일러 주셨다.
 
내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하기에 신부가 될 용기도 없었고, 설사 신부가 된다 하더라도 당시 내 눈에 비친 신부님들처럼 성덕(聖德)을 두루 갖추고 살 자신도 없었다. 공베르 신부님 말씀을 듣고나니 하느님께서 내 부족한 구석을 메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느님 도움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나 혼자 태산 같은 단점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 같다.
 
공 신부님은 얘깃거리가 무궁무진한 선교사다. 신부님은 경기도 안성을 '포도의 고장'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한국에 도착(1900년 10월 9일)하자마자 안성본당 초대주임으로 부임한 신부님은 가난에 허덕이는 주민들을 보고 프랑스에서 포도 묘목 20여종을 들여와 성당 앞뜰과 근처에 심었는데 그게 안성 포도의 원조다. 안성시는 2000년 '안성포도 100년 페스티벌'을 열어 주민들의 가난 타개에 기여한 그분의 공적을 기렸다.
 
3.1 만세운동 때는 일본 경찰에 쫓기는 사람들을 성당 안으로 들여보내고, 성당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한 뒤 치외법권지역임을 주장하며 경찰의 성당 진입을 막았다. 또 안법학교(현 안법고등학교)를 세워 주민들을 계몽했다. 안법학교의 안(安)은 안성(安城), 법(法)은 프랑스의 한자어 법국(法國)에서 따온 것이다.
 
신부님은 6.25 전쟁 때 피난을 가지 않으시고 인천 샬트르 성바오로수녀원을 지키시다 공산군에게 납북되셨다. 그 악명 높은 '죽음의 행진'에 끌려가 11월 옥사하셨는데, 75살 연로하신 몸으로 밧줄에 묶여 끌려가다 차디찬 감옥에서 눈을 감으셨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신부님은 내게 "미소 지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때는 내가 잘 웃지 않아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 당부를 곱씹어보니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마음의 긴장을 풀고 모든 것에 대해 너그러워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시려고 그러셨던 것 같다. 신부님은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넉넉한 웃음이 부족한 내게 "수환, 미소 좀 짓고 살라니까!"하고 채근하시지 않을까 싶다.
 
또 한 명의 스승은 일본 상지대학 시절에 만난 게페르트(Theodore Geppert) 신부님이다. 독일 출신의 예수회 회원인 게페르트 신부님은 표정은 무뚝뚝한 아버지형인데 반해 마음은 사랑 깊은 어머니 같은 분이다.
 
학병에 징집돼 전쟁터로 떠나는 날, 내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실 때 느껴졌던 신부님의 손 떨림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신부수업을 받다 말고 남의 나라 전쟁터로 향해야 하는 애제자의 서글픈 운명 때문에 흐느껴 우시는 신부님에게서 순수한 인간애를 느꼈다. 사제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는 데 있어 어머니 못지 않게 영향을 준 분이 게페르트 신부님이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일본 상지대학 유학시절 편 참조>
 
동성상업학교 갑조(갑조는 상업학교, 을조는 신학교) 교장이셨던 장면(요한, 1899~1966) 박사님도 큰 스승이다.
 
내가 수신(修身) 과목 시험시간에 일제 황국 식민화 정책에 반기를 드는 답안지를 내자 장 박사님은 나를 불러 야단을 치시다 뺨을 때리셨다. 학교를 폐교 위기로까지 몰아갈 위험천만한 내 행동을 꾸짖는 자리에서 또박또박 말대꾸를 했으니 맞을 만도 했다. 장 박사님은 성품이 유순하고 학생들을 늘 사랑으로 대하셨던 분이다. 그분이 교직에 계시는 동안 유일하게 손찌검을 한 학생이 나 아닐까 싶다.
 
세인들은 제2공화국 총리를 지내다 5.16 군사 쿠데타 세력에 의해 물러난 장 박사님을 무능한 정치인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평가는 쿠데타 주모자들이 자신들의 '거사'를 합리화하기 위해 당시 혼란한 정치 풍토를 부각시킨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장 박사님은 무능하고 실패한 정치인이 아니다. 그분은 독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평생 거짓을 모르고 사셨을 뿐만 아니라 공직을 십자가로 여기셨다. 하느님 정의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한 이 땅에 그 뿌리를 활착(活着)시키느라 애면글면하셨다. 현석호ㆍ박순천ㆍ조재천ㆍ정헌주ㆍ김대중 등 쟁쟁한 주변 정치인들이 그분 인품과 신앙심에 감동해 천주교에 입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공용(公用)과 사용(私用) 전차표를 엄격히 구분해 사용하고, 자신에게 테러를 가한 사형수들을 무기형으로 감형시켜놓고 형무소까지 찾아가 위로한 일화 등이 제대로 알려진다면 그를 '사도 정치인'이라고 부르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국제무대에서 펼친 외교적 성과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장 박사님은 1948년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해 유엔총회에서 남한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승인을 받아내셨다. 6.25 전쟁 때 유엔 안보리의 한국전 참전 결정을 신속하게 이끌어낸 주역도 그분이다. 장 박사님은 바티칸에 달려가 호소하고, 성지에 찾아가 성모님께 기도하면서 그 엄청난 일을 해내셨다. 장 박사님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분명 공산화됐을 것이다.
 
나는 1999년 장 박사님 탄신 100돌 기념미사에서 고인의 시복시성 추진에 대한 바람을 피력했다. 능력이 있다면 나라도 나서 정치인과 신앙인으로 거룩하게 살다 가신 고인의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하고 싶다.
 
[평화신문, 제923호(2007년 6월 3일), 정리=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