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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3. 아버지로서의 운석 선생


자녀 일람

≪친필 연보에 들어 있는 슬하 자녀 일람≫

[위의 사진은 어린 시절 운석 선생의 모습으로 직접 오려서 붙여 놓으신 것이다. 운석 선생 부부는 1918년 첫 딸 명숙(明淑)을, 그리고 1920년에 아들 영(英)을 얻었으나, 둘 다 돌과 백일을 넘기지 못하고 잃고 말았다. 이후로 운석 선생은 진(震, 1927), 건(建, 1932), 익(益, 1933), 순(純, 1935), 흥(興, 1939) 5남과 의숙(義淑, 1930), 명자(明子, 1941) 2녀를 얻어 무사히 길러 내었다.]



 운석 선생은 선각한 부친의 지도하에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는 신지식을 습득했을 뿐만 아니라 독신한 신앙생환을 바탕으로 안정된 내면세계를 영위할 수 있는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운석 선생은 이러한 자신을 바탕으로 자기 수양과 자녀 양육 및 부부생활 즉, 수신과 제가에 성공한 삶을 살았으며, 이러한 가정적 안정을 바탕으로 선생은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국가와 사회에 되돌리는 구도자적 헌신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건 보아라(見)

 
오래간만에 네 수서(手書) 접견(接見)하니 반갑다. 기간(其間) 무사히 선과(善課)하니 주은(主恩) 감사하며, 여기는 조부모(祖父母)님 양위(兩位)께서 구공탄(九孔炭) 와사(瓦斯, 가스) 중독으로 일시 급중(急重)하셔다가 이제는 소생 회복 중이시니 다행이다. 나는 방금 부산(釜山) 와서 시탕(侍湯) 중이다. (시탕이란 부모님의 병환 중에 모시고 탕약을 달여 간병해 드린다는 뜻이다. 원주)

 
너의 내년도 스칼라십은 Magnu 신부님께 네가 잘 교섭하여 또 얻을 줄 믿는다. 네 학과에 대하여는 무엇이고 충분히 배워 가지고 돌아올 것이니, 현대 미국 최신 건축술도 배우고 특히 한국 실정에 맞는 건축을 전공할 것이니, 현재로서는 한국의 공장·office building·학교 건물 등이 긴급 애청되며, 또 교회를 위하여는 성당 건축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자금(自今) 6년간은 더 공부해야 할 것 같다.

 
고층건물로는 10층 이내의 것이고 조명·급수·난방·냉방·전기·방화 등 제방면과 내부장식·위생 시설 등도 깊이 연구하고 네가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어떠한 건물이고 보통으로 심상히 보지 말고 건축학상 견지에서 세밀히 관찰하여 식견을 넓힐 거이며 언제나 건축 기술자의 안목으로 모든 면을 세부까지 연구·관찰하여라.

 
Mr. Horace Peasely 씨(대사관을 설계한 사람)를 종종 찾아가서 지도를 받는 것이 좋고 하휴(夏休) 중 jop도 금년부터는 어느 건축가 사무실에서 조수 노릇하여 배워가며 학비를 버는 것도 좋을 듯하다.

 
또 언제나 교리연구(敎理硏究), 열심수계(熱心守誡)에 전 정력(精力)을 집중할 것이고 모든 일을 다 천주교(天主)의 영광만을 위하여, 또 내 구령(救靈)을 위하여 바치는 것이다. 이 외에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 나는 언제나 너희들이 고명(高名)한 학자나 부자나 고귀한 자 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겸손하고 건실한 주(主)의 사랑을 받는 자 되기만 기원할 따름이다.

1월 13일 부(父) 쓰다(書)


 

건에게 보낸 편지

≪아버지로서의 운석 선생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3남 건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느끼리라. 효도론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아버지로서 자식의 앞길을 어떻게 인도하고 조언해야 할 지를 이보다 더 잘 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로서 운석 선생은 자식들에게 일신의 안녕과 영달을 위해 살지 말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 것과 충실한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내면의 안정을 기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아버지로서의 선생의 자녀 사랑은 참척(慘慽)의 한으로 남은 첫 딸 명숙과 첫 아들 영에게도 계속되었다. 선생은 1920년과 1922년에 잃은 두 자녀의 유해를 1939년 서울 중곡동 소재 교유묘지ㄹ노 이장하였으며,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해인 1965년에 다시 면목동 소재 가족묘지로 이장했음을 『친필연보』에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아버지 운석 선생의 사랑과 지도로 성장한 슬하 자녀의 면면을 사진과 함께 살펴보자.


친필연보

≪친필연보≫

[이 연보는 선생이 각종 기록과 매년 사용했던 수첩들을 토대로 1965년까지 일반 노트에 친필로 정리·작성한 것이다. 이 책의 모두에는 인동(仁同) 장(張)씨 보계(譜系)를 위시해, 1908년부터 1960년까지 20여 차례 이거(移居)한 곳의 주소지, 선영 소재지, 친가·외가·처가의 가계도, 부친 장기빈 옹과 운석 선생 본인의 이력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백미는 선생이 출생한 1899년부터 1965년까지의 가족 내 대소사와 국내외 사정을 연대기 작성 방식에 따라 노트 한 면은 "가족 및 국내사항"을 다른 한 면에는 "국제정세"로 나누어 기술해 놓은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선생 일생의 부침은 물론 가족의 성장과 국내외 정세에 아우른 이 연보는 이미 그 자체로 흠 잡을 데 없는 역사적 기록이다.]

수첩

수첩

≪수첩≫

운석 선생과 장남 진

≪운석 선생이 평양 교구 메리놀 외방 선교회 조선 지부(支部)에서 어학 교사로 근무하면서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1928년 경 장남 진을 안고 찍은 사진≫

[장진은 경기중학과 미국 안셀름 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톤 대학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브라운 대학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귀국 후 서강대 교수 및 부총장을 역임하였다.]


1936년 가족 사진

≪운석 선생이 동성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1936년 무렵의 가족 사진≫

[좌측으로부터 장의숙, 장익, 장진, 장건, 장순.]

1940년 가족 사진

≪1940년 3월 24일 부활절을 맞아 3남 장익의 첫 영성체를 기념해 찍은 가족사진≫

[가운데 휘장을 매고 꽃을 꽂고 있는 아이가 현 춘천 교구장 장익 주교다. 장익은 미국 메리놀 대학과, 벨기에 루벵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오스티라아 인스브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1963년 어술 교구 소속으로 인스부르크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서울대교구 부설 사목(司牧) 연구소장을 거쳐 현재 춘천교구 주교로 활동 중이다. 또한 그는 장기빈 옹 이래로 외국어에 능통한 가풍을 이어받아 집안 인물 중 가장 많은 외국어, 영어·불어·독일어·중국어·이태리어·라틴어·희랍어·아랍어·스페인어 등 9개 국어를 구사하는 국제통이다.]

1952년 가족 사진

≪1952년 2월 21일 국무총리 재직 중이던 운석 선생이 유엔총회 참석 차 도미했을 때 당시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수학 중이던 장남 진을 찾아 함께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으로부터 운석 선생, 차녀 명자, 김옥윤 여사, 장남 진. 뒷줄 왼쪽으로부터 삼남 익, 오남 흥, 장녀 의숙, 차남 건, 그리고 사남 순. 의숙은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미국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미술을 전공하였고 워싱턴 가톨릭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노틀담 수녀회에 입회하여 동 수녀회가 운영하는 고등학교의 교사로 근무하였다. 차남 건은 경기고와 서울 공대를 거쳐 위싱턴 가톨릭 대학과 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각각 건축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장순은 경기중 재학 때 도미하여 워싱턴 가톨릭 대학을 졸업하고 죠지타운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보스턴 소재 리지스 대학에서 정치학과 과장으로 외교학을 강의하고 있다. 장흥은 초등학교 때 도미하여 벨기에 루벵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워싱턴 주에 있는 곤자가 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를 엮임했으나, 현재는 프랑스 파리은행에서 근무하고 있다. 장명자는 서강대 영문과를 나와 펜실베니아에 있는 빌라노바 대학에서 도서관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재원이었으나 1987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