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대사로서 운석 장면의 업적을 평가하는 데 있어 전제가 되는 것은 해방 후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 역사를 어떤 눈으로 보느냐다. 즉 해방전후의 현대사를 해방을 기해 남북한에 각각 친미 보수정권과 친소 공산정권이 대두하여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사 발전의 기회를 압살해 버린 암울했던 역사로 보거나, 남한의 경우 분단의 고착화를 배경으로 우익 독재정권이 반공을 내세우면서 그 기득권을 확대해 나가는 한편 대외적으로 미국의 종속국가로 전락해간 시기라고 본다면, 운석의 역할은 비극의 민족사를 이끈 주역 중의 한명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퇴영, 침체, 죄절의 늪이 아니고 한국인이 자유·평등·민주주의 동 보편적 이상을 향해 전진을 재촉”했던 시기로 보는 발전적 입장에서 조망할 때, 그리고 당시의 한미관계를 “후원자와 수혜자”, “침략자와 피침략자”,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보는 극단적 입장, 즉 한미관계가 미국의 일방적인 이익만을 위해 전개된 것이라는 시각을 탈피할 때 운석 선생이 주미 대사로서 이룩한 업적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즉, 당시의 한미관계가 미국 측의 일방적인 전략적·경제적 이해타산만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에 의한 미국과의 유대 강화와 이를 통한 우리 국익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한미관계사를 본다면, 선생은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를 쌓고 이를 이용하여 역사상 최초로 서구중심 세계질서 속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데 있어 결정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한 최대의 공헌자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업적을 평가하면, 선생의 공적은 다음과 갈은 것을 꼽을 수 있다.
첫째, 그는 덜레스 등 미 정부인사들과의 긴밀한 유대를 바탕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신생 대한민국에 대한 UN의 승인을 비롯한 미국 주재 각국 대사관의 접촉을 통해 33개국의 개별적 승인을 얻어냄으로서, 조선시대 이래 “은자의 나라”로 알려진 폐쇄성을 극복하고 UN 등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초석을 쌓았다.
둘째, 그는 한국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시피한 미 정부인사에 대한 외교활동과 함께 미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순회강연과 언론매체 등을 통한 한국 알리기 작업에 매진함으로서, 미국 내에 호의적 한국관이 형성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셋째, 그는 남북한간의 군사적 불균형이 야기할 국방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토에 필적하는 “태평양 동맹”과 같은 집단안보체제의 도입을 구상하고 이의 실현을 도모한 바 있으며, 불의의 6·25 전쟁을 맞아 미국과 UN에 대한 외교활동을 통해 미군과 16개 유엔 회원국의 참전을 이끌어냄으로서 풍전등화와 같던 조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 밖에도 선생은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나 주미대사 등의 국제적 외교활동을 통해 1951년 이후 그가 본격적으로 전개한 정치활동에 있어 유용하게 활용될 자산들 ―국제적 외교활동 경험, 미 정부 인사들을 비롯한 외국 인사들과의 유대관계, 그가 거둔 공적에 대한 국내의 좋은 평판 등―을 얻는 부수적 성과도 거두게 되었다.
≪1950년 주미대사관 요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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