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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6. 초대 주미대사 시절


 미국은 조선왕조가 최초로 그 문호를 개방한 서구 국가로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래 서구제국 중 한국과 가장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은 두 개의 상충하는 눈으로 미국을 보고 있다. 하나는 호의적인 시각으로,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일제를 몰아내고 해방을 가져다 준 세계 최강의 문명국이자 우리의 이해를 대변하는 최대의 “우방”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사발전을 왜고하는 제국주의적 패권국가로 인식하는 것이다. 해방 후 특히 6·25 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전자에 속하는 대미인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운석 선생의 경우 전자에 속하는 시각으로 미국을 보고 미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 대한민국이 미국에 파견한 초대 주미대사이다.

 
구한말인 1888년 1월 최초의 주미공사 박정양(朴定陽)이 고종의 국서를 미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공관을 개설한 지 60여 년만인 1949년 3월 25일 상오 10시, 장면 초대 주미대사는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에게 아래와 같은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제정사를 낭독하였다.

 
“대통령 각하, 본인은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 각하에 의하여 민국에 최초로 파견된 특명전권대사로서 각하께 이러한 신임장을 직접 제출하게 되어 자랑스럽고도 특별한 영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역사적인 신임장 제정 의식은 대한민국 국민과 정부가 미국 국민과 정부에 대하여 상호과심의 강한 유대를 통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강화하고자 하는 염원 증좌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국민은 귀 국민의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적 성취를 깊은 경탄과 관심으로 고찰하고 연구해 왔습니다.

 
본인은 각하께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은 대한민국이 최근 독립을 되찾고 입헌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귀국이 행한 역할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각하께서 금년 1월 1일 부로 대한민국에 대해 최초로 법적 승인을 함으로써 대한민국이 평화애호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설 수 있는 지위를 회복시켜 주신 조치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각하 본인은 훌륭하신 영도력을 통해 세계 전 국민의 사랑, 찬탄, 그리고 존경을 받고 계시는 각하께 본인의 개인적 소망과 아울러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부의 이름으로 강녕을 축원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세계의 기초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정의와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귀국의 위대한 국민과 정부의 협력을 열망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본인이 담당해야 할 무거운 책임을 인식하면서 귀 국민과 정부가 보내줄 우호와 협력의 바탕 위에 각하와 귀 정부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본국 정부의 훈령을 이행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본인은 오늘 본인의 업무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가동되기 시작하는 외교관례들이 상호이익을 증진할 뿐만 아니라 번영하는 자유세계를 건설하는 과업에 뚜럿한 기여가 됨으로써 생산적인 결과를 수반하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에 답해 트루먼 대통령이 “대사, 대한민국 정부에서 미합중국에 특명전권대사로 최초로 파견된 귀국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로부터의 이 신임장을 귀하에게 접수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장 박사, 본인은 대한민국 대사로서의 당신을 환영하며 귀국과 세계의 평화애호국을 위한 귀하의 노력과 능력에 대한 신뢰로부터 당신에게 축하를 보내는 바입니다”라는 답사를 읽음으로서 운석 선생은 대사로서의 공식활동을 개시하였다.

 
운석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그의 주미대사 임명은 전혀 예기치 못한 의외의 사건이었다. 선생은 제3차 유엔총회에서의 외교적 성공을 거둔 뒤 로마 교황청을 예방하고 일행보다 뒤늦게 12월 26일 미국에 도착하였다. 선생은 미국에서 “돌연한 대사 발령에 어리둥절” 했다고 한다. 다음은 그 때를 회상하는 선생의 회고담. “뉴욕에서 곧 워싱턴 당국을 방문하여 정식 사례인사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인사가 미처 있기도 전인 1949년 1월 1일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이 정식으로 대한민국을 승인한다는 발표를 행하였다 … 3일날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국무성 전례국을 찾아가 트루먼 대통령을 만날 절차를 협의하였다. 이때 직원 한 사람이 이 대통령으로부터의 전보를 내주면서 마침 잘 되었다고 말하였다. 내용은 간단하게 ‘아직 귀국하지 말고 잠깐 대기하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지시였다. 이 불의의 지시 내용에 의혹을 품으며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5일 정오께나 되었을까 내가 묵고 있는 워드맨 파크 호텔로 갑자기 일단의 기자들이 찾아왔다. 대뜸 질문이 ‘초대 주미 대사로서의 소감을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일이다. 통신을 기자가 보여주었다. 내가 주미대사에 임명되었다는 내용을 읽었다. 반신반의하면서 코멘트를 회피하여 놓고 있으려니까 6일에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발령전보가 도착하였다. 


신임장

≪신임장≫


예복 차림의 운석 선생

≪워싱턴에서 미남 대사로 알려져 있던 예복 차림의 운석 선생≫

["조용한 귀공자". 주미대사 시절부터 선생의 비서로 활동한 이홍렬(李泓烈)은 선생을 "온갖 것에 안목이 높은 멋쟁이"로 "건물, 정원, 가구, 장식, 의류, 식기 등 신변의 잡다한 사물에도 퍽 높은 안목과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한표욱이 기억하는 바로는 선생이 좋아하던 단골 메뉴는 화려한 프랑스 요리가 아니라 국수였다. "장면 대사는 국수를 무척 좋아했다. 밤 8시가 넘어 일과가 끝나면 장 대사는 으레 함께 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청했다. 장 대사의 단골 음식점은 워싱턴 DC와 메릴랜드주의 경계선에 있던 '북경'이라는 중국집이었다. 장 대사는 특히 '달루맹'이란 국수를 즐겨 찾았는데 나중엔 우리 일행이 가면 주인은 묻지도 않고 달루맹을 내놓을 정도가 되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은 신교가 다수 우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 주재 초대 대사에 가톨릭 신자인 운석 선생을 임명하였을까? 그 해답은 이대통령의 정치고문이자 개인비서 역할을 수행한 로버트 올리버와 이 대통령의 미주 지역 독립운동 거점인 구미위원부의 정치위원으로 1944년부터 활동하다가 주미대사의 1등서기관으로 배속된 대통령의 측근 한표육의 입을 통해 알 수 있다. 먼저 올리버에 의하면 운석 선생은 “가톨릭 신도로서 정부를 특별히 지지하는 광범위한 기반을 구축하였고 그의 온건한 견해와 조용한 인품이 적을 만드는 일이 없다는 이유로 초대 주미대사에 임명”된 것이었다. 한표욱에 따르면 원래 이 대통령의 생각은 구미위원부 의장직을 맡아보던 임병직을 주미대사에 임명할 생각이었지만, 장택상 외무장의 사임으로 인해 임병직을 후임 장관으로 발탁함으로써 주미대사 자리가 운석 선생에게 돌아간 것이었으며, 그 이유는 미국 내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이는 한표욱이 가톨릭 신자인 운석 선생의 대사 임명을 비난하는 미국 내 이승만 지지세력들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워싱턴에 있을 때 뉴욕의 세인트 패트릭 성당의 총책임자인 스펠만 추기경(Francis Cardinal Spellman)과 깊은 친교를 가진 이야기, 스펠만 추기경이 철저한 반공노선의 천주교 진도자라는 것, 그리고 개신4와는 달리 미국의 천주교회는 거의 말 그대로 똘똘 뭉쳐 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가톨릭 교회의 이러한 반공노선을 의식하고 있어서 그들의 지원이 절대로 필요한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으로 그 이유를 해명한 데서 알 수 있다. 

미국 가톨릭 자선회 만찬 모임에 참석한 운석 선생

≪1882년에 창립된 미국 가톨릭 자선회(Knights of Columbus) 68회 정례 만찬 모임석상에 참석한 운석 선생≫

[앞줄 좌로부터 스펠만 추기경, 자선회 회장(Supreme Knight of the K. of C.) 스위프트(Jhon e. Swift), 뒷줄 운석 선생과 디버(Paul A. Dever) 매사추세츠 주지사. 운석 선생의 주미대사 임명은 미국내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얻기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계산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운석 선생은 가톨릭 세력의 지지만으로 주미대사에 임명된 것일까? 물론 그것도 주된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보다 큰 이유는 그의 자질 및 업무수행능력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유엔총회 기간 중 운석 선생의 활동을 지켜 본 올리버가 이 대통령의 운석 선생에 대한 평가를 요구한데 답한 인물평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 대통령은 올리버에게 운석 선생에 대해 “그가 파리에서 어떻게 처신했는지 정확한 의견을 말해 보시오. 미국 고문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어떠하였소? 그의 부족한 점은 무엇이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안다면 특별훈령이나 우리의 충고로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겠소?”라는 인물평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답혀 올리버는 다음과 같은 평을 써 보냈다.

 
“장면 박사에 관해 생각하건데 그는 훌륭한 대사가 될 겁니다. 그는 착실하고 믿음직스럽고 노력형이고 또 조직적입니다. 그는 태도가 명랑하고 성미가 부드러워서 적의를 사거나 반감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습관과 일반적 위풍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판단컨대 그의 두 가지 결점을 말한다면, (1)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일하기가 힘듭니다 ― 다시 말씀드려서 권한을 위임하는 일이 어렵고 그렇게 됨으로써 자기가 얻을 수도 있었을 도움들을 최고로 활용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생각하건데 대표들 전원이 이 점을 매우 예민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 그러나 그가 적절한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이 점은 극복될 수 있는 결점입니다. 이것은 주로 행정에 대한 경험부족이라든가 혼자서 최선을 다할 수 있고 또 결과를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양심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그의 둘째 결점은 미국 고문들에게 너무 의존하고 자기 자신이 자주 독립 정부의 대변인이라는 느낌을 덜 생각하는 경향인가 합니다. 그러나 이 결점 자체도 한국이 당분간은 미국의 경제 및 군사원조에 의존하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 득이 되는 미덕으로 발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대사는 국무성이 신뢰하는 인물이어야 하고 과거부터 우리들이 너무 말썽 맏은 처지였기에 ‘협력적’이라는 옛 단어를 적용시킬 수 있는 인물들이어야 한다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만일 장 박사에게 (다른 어느 대사에게 하듯이) 어떤 정부계획을 진행시키도록 한다면 그는 최선을 다하여 따라가리라고 자신합니다. 그리고 여하한 경우라도 모든 기본적인 정책결정은 한국에서 이루어져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인물평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운석 선생이 대사직 수행에 “비판의 여지가 없는”뛰어난 자질과 미 정부 인사들과 구축한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주미대사로 임명된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직속세력을 통해 정부의 공식조직을 통제 감시하는 이 대통령의 정치적 스타일로 인해, 즉 “여하한 경우라도 모든 기본적인 정책결정은 한국에서 이루어져야만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선생의 대사로서의 활동에는 상당한 제약이 따랐다는 점이다. 여하튼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 계열의 인물로서 대통령 신뢰를 바탕으로 주미대사에 임명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정치적 지반인 가톨릭 세력의 확고한 지지와 자신이 유엔에서 거둔 외교적 공적, “비판의 여지가 없는” 자질 및 미국 정부 측 인사들과의 사이에 구축된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었다. 일례로 그의 흠잡을 데 없는 업무수행과 자질에 대해서는 “박사님의 개인 비서로서 저의 역할은 남이 원하는 대로 박사님의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하기보다는 오히려 박사님의 생감이 그들에게 수락되도록 노력하는 데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이 대통령과 직보체제를 유지하며 정부의 공식기관인 주미대사관의 활동에 간여한― 일종의 감시자였던 올리버조차 대사관 소요 예산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운선 선생의 입장을 대변해 줄 정도였다.

 
“엘살바돌 대사에게 월 1천 불의 봉급과 5백 불의 개인 비용이 계산되어 있으며 장 대사에게 제시된 숫자의 약 2배에 달하는 직원을 둘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워싱턴의 생계비는 전쟁 직전보다 약 2배나 올랐습니다. 이 사실들은 박사님이 참작하고 싶어하시는 사항들이며 한국 내에서 정부 세입을 한푼이라도 뜯어가려는 여러 가지 각박한 요구와 견주어 균형을 맞추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덧붙여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박사님의 경비에 대한 장 박사의 일반적인 태도에 크게 만족하리라고는 하는 저의 생각 말씀입니다. 그는 전혀 사치스럽게 생활하고 있지 않고 또한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사무실의 위신을 지키고 싶어합니다. 그는 저에게 차량이 없어서 일어났던 한 난처한 사정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얼마 전 그가 중국대사관을 나섰을 때 비가 몹시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인들이 창문을 통해 한국대사가 우중에 서 있는 광경을 내다보고 있는 동안 택시를 기다리느라고 30분간이나 비 속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물론 워싱턴에 익숙해질수록 그는 보다 요령있게 해 나가는 방법을 배우게 되겠지요. 그러나 예산심의를 위해 제출한 지금 액수로는 수수한 생활을 유지하기조차 힘들게 될 것입니다.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서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서 승용차와 함께≫

[트루먼 대통령 취임식(1949년 1월 20일)에 특사로 참석하기 위해 예복과 모자를 갖추어 쓴 선생의 모습이 이채롭다. 다음은 선생 뒤에 서 있는 자동차에 얽힌 사연 하나. "대사로 임명되었으니 각국 주재 대사와 공사를 예방해야 한다. 자동차가 있을 리 없다. 궁여지책으로 1시간에 5불씩 하는 고급차를 빌려서 순회예방을 개시하였다. 모두들 반가이 나를 맞아주었으나 하나 우환거리가 생겨났다. 상대방을 만나고 물러나올 때는 친절히 문 앞에까지 전송을 나오는 것이다. 세내서 타고 온 차가 시간은 넘어 벌써 가버렸다. "이크 이 운전수가 또 망나니를 부리는군'하며 어색하게나마 전송 나온 측에 나의 대사로서의 위신을 수는 수 밖에 없었다. 하루는 비율빈 대사의 예방을 마치고 나오니까 비가 줄기차게 퍼붓고 있었다. 차를 잡느라고 30여 분 동안 길가에서 애를 쓰다보니까 일국의 대사가 쪼르르 비를 맞았다. 그때의 비애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쯤 되면 화가 날 대로 났다. 서울에 연락하여 차를 한 대 사야겠다고 요청했다. 회답은 중고차를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대사의 위신을 세울 수 있는 새차 '뿌익'을 한 대 살수 있었다. 그것은 파리 총회 때 쓰던 여비 중 3,000 불을 절약하여 저금해 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보고하였더니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