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 냄새를 풍긴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사실 위주임은 물론이다. 세상에 잘못 알려진 허위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데 기여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한 역사적인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정치 비화를 추적하면서 해명키로 한다.
이 운석 시대의 대사건은 원칙적으로 사건 발생의 순위이며, 그 내용에 대한 책임은 운석 기념 출판회에 있음을 밝혀 둔다.
1
10여 년에 걸친 자유당 정권의 부패된 유산을 정리하기란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회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혼란을 극복하자니 많은 시일을 필요로 했다. 묶였다가 놓여난 군중들은 정부를 통하여 절대적인 자유가 베풀어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민주당은 사회적 정치적인 격랑 앞에서 갖은 시련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밖으로 사회 풍조를 바로잡고 안으로 원내 안정 세력을 확보해 가면서 자유의 진통을 몸소 겪어 나가야 한다는 숙명적인 고뇌 앞에서 제2 공화국은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세간에 '3월 위기설'이니, '4월 위기설'이니 하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매사를 민주주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기본 방침이 흔들려 본 일이 없었고, 1961년 상반기로 말하면 그제야 여러 가지 혼란이 겨우 안정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당이 내세운 정책을 밀고 나갈 그런 바탕이 마련될 때였다. 독재와 탄압은 위정자에게 있어서 가장 손쉬운 통치 방법이다. 민주당 정부는 독재와 항거하여 형성된 정당인 만큼 시종 여일하게 민주주의식 기능밖에 발휘할 다른 대책이 없었다.
1960년 9월 10일 서울 충무가(忠武家)에서 군 일부가 밀회하여 쿠데타 결의를 구체적으로 모의했다는 실증이 드러났다. 그것은 민주당의 제2공화국이 성립된 지 불과 18일 만의 일이다. 그리하여 1961년 5 16은 왔고 이른바 '무혈 군사 혁명'은 이 땅에 왔다.
거기에는 심각한 역사적 아이러니가 있다. 결국엔 운석 시대의 종언을 고한 가장 불행한 사태였다는 사실을 역사는 입증해 준 것이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뒤 벅찬 시련만 겪다가 이렇다 할 정치적 실적도 거두지 못한 채 군사 정변을 만나고 말았으니, 이는 국가의 불행이요 운명적인 수난이었다. 하물며 정권의 총책임자인 장면 박사 자신에 있어서랴….
그러면 5·16은 어떻게 해서 왔는가.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을 몇 가지만 해명해 본다.
2
민주당 정권하 국방 문제의 역점은 군수 물자 부정 처리를 강력히 단속하여 발본 색원하는 데 있었다. 쌓이고 쌓인 부패 부정이었다. 군의 상하를 막론하고 군수 물자를 부정 매각 처분하여 치부하는 사례가 이 정권하에서 비호되었고 보면, 그러한 타성을 뿌리 뽑는 일이 시급하고도 중대한 문제였던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국방 문제에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군의 감군 정예화였다. 민주당은 야당 시절부터 늘 정군을 당의 정책으로 들고 나온 바 있었다. 국민에 대한 공약을 실천하기 위하여 민주당은 정권을 잡자 감군을 서두른 결과 5만 명에 가까운 장병들을 감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고급 장성들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므로 군에서 정부의 처사에 불만을 살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하극상 사건'이 일어났고 1961년 5월에 들어서자마자 수상한 정보가 꼬리를 물었다. 이러한 일들이란 평상시엔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성격의 사건이라 당초에 크게 문제 삼진 않았다. 당시 현석호 국방부 장관은 수상한 정보에 접하게 되자, 비밀리에 그 전모를 알아보기에 최선을 다하려 했다. 군 일부에서 모종의 모의를 하고 있다니 심상찮은 정보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도영 육군 참모 총장까지 관련된 정보이고 보면 문제는 소름끼칠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비밀리에 내사를 하기 시작했을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장도영 참모 총장이 직접 국방부 장관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군 일부에서 모의가 있다는 설이 유포되어 있습니다. 본인도 거기에 가담해 있다고 모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전혀 사실 무근이니 그리 아십시오. 그런 움직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 부사령관도 그런 모의를 꾸밀 사람이 아닙니다. 믿어 주십시오"
라는 것이었다. 국방부 책임자가 물어 보기도 전에 참모 총장이 먼저 찾아와 이런 자세한 설명까지 하니 믿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모측에서 참모 총장과 제2군 부사령관을 음모하려는 계획적인 조직입니다. 장관님은 절대로 현혹되지 마십시오."
현(玄) 국방 장관은 전례에 비추어 다시 한번 장 총장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전례라 함은 박정희 소장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하여 한때 좌천된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 장 참모 총장이 직접 나서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옹호하면서 신분을 의심할 사람은 결코 아니라고 국방 장관에게 건의했던 사실이다. 그때에도 참모 총장의 뜻대로 일은 무마되었다.
5월 초순, 좀더 정확히 말해서 5·16 정변을 만나기 10여 일 전에 벌써 정권을 전복하려는 음모는 세상에 알려진 바 되었다. 장면 국무 총리는 무려 네댓 차례나 그런 정보를 들었고 그때마다 관계자를 만나 그 진의 여부를 가려내고자 갖은 애를 썼던 것이 사실이다. 장도영 참모 총장한테 여러 차례 물어 보았고 또 이태희(李太熙) 검찰 총장에게도 직접 지시를 내려 사실을 밝혀 내기를 엄명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손발이 맞지 않았다. 참모 총장은 "전혀 사실 무근입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이 검찰 총장은 "모의를 꾸민 혐의자를 조사해 보았으나 증거가 잘 포착되지 않습니다"라는 정도의 미온적인 답변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민주당 정권의 딜레머가 있고 눈앞에 비극의 날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 박사는 육군 참모 총장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검찰 총장의 말 또한 믿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장 박사에게 다른 대책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이 쿠데타를 만나야 할 무슨 근원적인 과오도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도 어색한 노릇이었는지 모른다.
3
그러나 비극의 날은 왔다. 5월 16일 새벽. 한 두시쯤에 참모 총장이 반도 호텔의 국무 총리에게 비상 전화를 건다. 5월 15일 늦도록 당무 회의를 가졌던 관계로 장 박사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참모 총장이 비상 전화로 말하였다.
"총리 각하,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아무 염려 마십시오. 30사단에서 장난을 하려는 것을 막아 놓았고 지금 해병대 공수 부대가 임경하려는 것을 한강에서 저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장 박사는
"한 주일 전에 내가 뭐라고 했소? 빨리 와 주시오,"
하였다. 그 길로 참모 총장은 국방부 장관에게 연락을 했다. 현(玄) 장관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반란이 났습니다."
"누가 하는 짓이오?"
"박정희가 주동입니다."
"참모 총장은 지금 어디 있소?"
"장 총리에겐 피신해 달라는 연락을 했습니다. 즉시 나오십시오. 시청 앞 507 특무대인데 빨리 오셔서 수습해야겠습니다."
두시가 조금 지난 시간 조선 호텔 건너편 특무대에서 참모 총장과 만난 국방 장관은 현장에서 작전 지휘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통령에겐 연락이 되었소?"
"아직 안했습니다."
"빨리 연락해 놓으시오."
참모 총장은 그때에야 윤 대통령에게 연락을 취했다. 특무대에 있다가 국무 총리를 만나러 가는 동안 이미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온다. 사태 수습을 위하여 국무 총리로 하여금 긴급 대책을 세우도록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국방부 장관 일행은 반도 호텔로 달렸다.
사태는 위기 일로에 있었다. 장면 국무 총리는 아래층에 내려와 경호원들과 서성대고 있었다. 세시가 넘어 네시 가까운 시각. 총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린다. 이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시 오겠노라던 참모 총장은 종내 나타나지 않는다. 경호원을 두고 보초를 세워 10여 분 기다렸으나 아무 연락도 없다. 검찰총장의 자동차가 국무 총리를 모시겠다고 했으나 겁을 낸 운전수가 그 자리를 피하여 뜻대로 되지 못했다.
부랴부랴 반도 호텔 뒷문으로 빠져 나온 국무 총리 전용차는 청진동 골목으로 하여 한국 일보사 건너편에 있는 미 대사관 숙소로 달려가 문을 두들겼으나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장 박사를 태운 차는 새벽의 어둠을 뚫고 원남동 로터리를 지나 혜화동 쪽으로 질주해 갔다. 누구도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총소리가 어느새 서울 중심가를 누비고 있다. 국방 장관은 장 박사를 보내고 반도 호텔 쪽에서 특무대 쪽으로 가다가 시청 앞에서 무장 군대들과 부딪쳤다.
"누구야!"
"국방 장관인데."
"할 수 없소. 내리시오. 혁명이 일어난 것 모른단 말이오."
지프차에 타고 있던 국방 장관은 벌써 행동의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지금의 대한 체육회 자리에서 선 채로 한참 동안 억류되어야 했다. 삐라가 미명을 타고 가두에 살포되고 있었다. 읽어 보니 장도영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국방 장관은 일대 충격을 받고 그만 질려 버린다. 국방 장관을 비롯한 10여 명의 인사들은 시청으로 인계되어 시장실에 억류되어야 했다. 살벌한 침묵이 흐른다. 한참 뒤에 날은 밝아 오고, 참모 총장이 매우 바쁘게 시장실을 드나들고 있다. 현 국방 장관이 따져 묻기를,
"참모 총장, 이거 어떻게 된 거요."
처음에는 대꾸를 못하더니,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로 미룹시다."
일행은 아침 10시 가까이 되어 청와대로 갔다. 윤보선 씨와 자리를 같이한 사람들은 박정희 소장과 3군 참모 총장, 유원식, 그리고 민주당 각료로서는 현석호 씨뿐이었다. 대통령에게 5·16 비상 사태의 경위를 설명하기에 박 유 두 사람의 발언이 많았고 대통령직을 고수하면서 이 사태를 수습하라는 것이었다. 논쟁은 윤 대통령과 현 장관 사이에 격렬해진 감이 있었다.
윤 대통령은 제1성으로 "올 것이 왔다!"고 말하면서, 5·16 사태를 애국적 행동으로 찬양해 마지않았다. 이에 국방 장관은 "우리는 정권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지할 생각은 없소. 하지만 합헌적으로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주장했고, 윤보선 씨는 매우 불분명한 태도를 취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약점을 공박하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4
한편, 장면 국무 총리는 혜화동 가르멜 수녀원으로 피신하여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하고 사태의 진전을 불안 속에서 초조로이 응시하고 있었다. 민주당 각료들은 연행되어 서소문 외무 장관 관저에 감금되었다.
사태는 유동적이었다. 유엔군 사령관이나 주한 미국 대사는 윤 대통령을 찾아가 무려 3시간이나 혁명군의 토벌을 졸랐으나 허사였다. 윤 대통령으로는 장 국무 총리의 연락을 기다린 모양이나 종일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16일 밤 윤 대통령은 중앙 방송국을 통해서, "장 국무 총리 이하 전 국무 위원은 한시바삐 나와서 이 사태를 수습하기 바란다"고 요망했다.
그 무렵 장 총리로서는 모측과의 비밀 연락이 있었으나, 모측에서는 장 박사에 대하여 "윤 대통령의 생각이 당신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난처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국무 총리의 행방은 17일이 저물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벌써 때는 늦었었다. 측근자인 한창우 씨가 수녀원에 갔지만, 처음에는 면회되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메리노 수녀원장을 불러,
"원장님,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아십니까. 다 알고 있습니다. 문을 안 열어 주시면 밖에다 알려 버리고 말 텝니다. 장 박사가 여기 은신 중이라는 사실이 밖에 알려지면 이 수녀원이 그대로 불바다가 되고 맙니다. 알아서 하시오."
좀 위협적인 말을 한 다음에야 문이 열렸다. 그런데 웬일일까. 응당 응접실로 안내해야 할 것을 뜰앞 정원에 세워둔 채 연락이 없었다. 한 10분이나 어처구니없이 기다려서야 안내되었다. 정원 뜰에 세워 놓고서 위층에서 내려다보고 한씨 자신인 것을 정작 확인한 다음에야 원장실로 안내하여 거기서 장 박사와 만나게 해주었다. 먼 발치로 사람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만나 줄 정도로 장 박사는 세심한 주의를 다하였다. 수녀원 원장실에서 두 사람은 상당히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장 박사는 매사에 있어서 장 박사다웠을 뿐이다. 대세는 이미 판가름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장 박사는 첫째, 외부와의 활발한 연락이 불가능했고, 둘째, 그러다 보니까 시간은 벌써 늦었다. 그것이 장 박사로 하여금 치명적인 운명을 재촉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장관들이나 측근자들과의 연락이 너무 오랫동안 끊어져 있었다. 겨우 한씨로부터 장 총리의 거처를 연락받은 국무 총리의 개인 고문 미국인 도날드 위터커는 18일 아침에야 가르멜 수녀원으로 장 박사를 찾아가 사태 수습을 논의하고 장 총리의 희망대로 장도영 참모 총장에게 달려가 연락을 취하자, 장 중장은 직접 장 총리를 만나고 신변 보장을 책임지기로 확약한 끝에 18일 정오에 중앙청에 나타나 연금 상태에 놓인 각료들과 최후의 각료 회의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군사 혁명 위원회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중앙청이었다. 때는 이미 늦었다. 쿠데타 발발 55시간 만에 사태는 완전히 그 추이가 결정된 것이다. 마지막 각료 회의는 제69차 임시 각의였다. 장 국무 총리로서 회의를 주재한 마지막의 순간, 각료들 누구라 할 것 없이 침통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민주당 내각은 총사퇴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안경도 쓰지 않은 채 굳은 표정의 장 국무 총리의 육성이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 곡곡에 메아리쳤다.
"금번 군사 사태의 발생에 대하여 우리 일동은 정치적,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고 총사퇴하는 바이니 국민 제위의 양해 있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사후 수습에 있어서는 유혈을 방지하고 반공 태세를 강화하여 국제적인 지지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가기를 희망한다. 1961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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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동 자택에서 이 방송에 귀를 기울이던 장 박사 측근의 모씨는 그 자리에서 트랜지스터를 집어던져 버렸다. 그러나 이미 울분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그날부터 일제히 연금 상태에 놓인 민주당 각료들은 그 다음날 서대문 교도소로 직행하는 비운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장 박사의 자택에도 많은 수의 군인들이 몰려와 연행해 가려고 밤늦도록 승강이를 벌이기 여러 시간 만에 장 박사에 한해서 연행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연락이 있었다.
그 후 장 박사는 침묵의 세월 속에서 나날을 보내며 신앙 생활에 몰두하면서 인생 무상을 달래기도 했다. 이듬해 가을 이주당 사건의 혐의로 한 때 수감되기도 했으며, 그리고 소위 정정법에서 해제되기는 66년 5·16을 맞을 때였으니 별세하기 불과 몇 주일 전이었다.
결국 민주당 정권은 집권 8개월 동안 정치 작업을 진행하던 도중 그 종말을 고하게 되었으므로 그 자체의 업적으로 정치적인 비난을 받을 만한 근거가 없다는 중론이다.
한편 전 대통령 윤보선 씨는 그의 '회고록'을 통하여 자신은 5·16에 근본적으로 동의한 바 없으나,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첫째, 장 국무 총리와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었고, 둘째, 일선으로부터 군대를 출동하는 경우 휴전선의 방비가 우려할 만한 것이었으며, 셋째, 어떠한 일이 있어도 유혈 사태를 방지하고 비상 사태를 수습할 애국 충정에서 만부득이한 처사였음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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