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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운석 시대 7대 사건 - Ⅲ. 대구 개표 중단 사건

 운석 장면 박사 생존 시에는 하고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 많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장 박사가 몸소 체험했던 가장 벅찬 정치적인 사건들을 사건별로 간추려 드라마틱하게 엮어 본다.

 픽션 냄새를 풍긴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사실 위주임은 물론이다. 세상에 잘못 알려진 허위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데 기여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한 역사적인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정치 비화를 추적하면서 해명키로 한다.

 이 운석 시대의 대사건은 원칙적으로 사건 발생의 순위이며, 그 내용에 대한 책임은 운석 기념 출판회에 있음을 밝혀 둔다.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흐른다. 여기는 대구. 1956년 5월 중순. 저마다 충혈된 눈들이 투표함을 쏘아보고 있다. 거친 호흡 소리가 물을 끼얹은 듯한 장내에 스쳐 간다. 뜨거운 숨결이다. 충혈된 눈과 거친 호흡에 응수하듯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 댄다.

  "아, 대구? 그렇소! 여기가 최고 위원실이오. 사수하시오! 투표함을 사수 하시오!"

  수화기를 놓았다.

  "나쁜 놈들! 공산당보다도 더 지독한 놈들!"

  다른 전화기의 벨이 또 울렸다.

  "안돼요! 사수하시오!"

  수화기를 놓자 누군가가 또 욕을 퍼부었다. 이번에는 이편에서 먼저 수화기를 들고 전화국을 불렀다. 교환양의 음성이 들린다.

  "대구! 대구 부탁합니다. 여기 어딘지 알죠? 네, 빨리!"

  수화기를 놓을 사이 없이 친절하게 대구선의 코드를 급히 꽂아 주는 것이
었다. 부탁할 때마다 교환양들은 완전히 이편이다. 대구의 교환양들도 마찬가지다. 대구 전화가 시내 전화만큼이나 빨랐으니 말이다. 대구가 나왔다.

  "여기 서울이오! 민주당 중앙당이오…. 전등이 꺼졌다구? 초를 준비하시오. 그리고 변소에 가지 말고 요강을 갔다 놓으시오. 뭐요? 자리를 비우면 안돼. 잠시라도 비우면 바꿔 칠 테니 말이오. 투표함과 개표 용지를 어떻게 하든지 사수해야 하오! 명심하고 사수하시오! 한국의 민주주의의 성패가 대구에 달렸소!"

  수화기를 놓은 사람은 민주당의 모 최고 위원이다. 그리고 그들은 최고 위원실에서 대구의 비상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벽에는 고 해공과 운석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대구에 내려간 한근조, 김상돈, 현석호, 제씨한테선 무슨 연락이 없습디까?"

  "조금 전에 온 전화에 의하면 아직 개표장에 못 들어갔답니다."

  "그렇게도 살벌한가?"

  "개표장에 들어가려면 희생당하는 것쯤 각오해야 할 형편인가 봅니다. 개표 중단이 된 후에 아무도 들어가지도 또 나오지도 못하고 있다잖소."

  민주당의 최고 위원들은 최고 회의실에서 벌써 이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전국의 개표는 모두 끝났다. 그러나 대구는 연 이틀 동안 개표가 중단된 채 자유당의 음모와 압력이 계속 가해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른바 대구 개표 중단 사건이란 역사의 오점이 이때 찍힌 것이다.

  1956년 5·15 정 부통령 선거 개표의 불상사가 그것이다. 


 
2


 
  민의는 기울고 있었다. 민주당이 창당된 지 1년도 못 되었지만 민의는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쏠리고 있었다. 민심은 천심, 그 누군들 막을 길 없는 것. 이 민의의 동향은 자유당 폭정에 의한 필연적인 조건 반사였다. 이를 당연한 처사로 안 민주당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더욱 바짝 고삐를 움켜 쥐며 외치기를 거듭했다.

  "못살겠다. 갈아 보자."

  이 표어는 민주당의 상징이 되었을 뿐더러 5 15 정 부통령 선거의 역사적 상징이 되기도 했다. 8년의 독재적 학정으로 달려오던 한국의 어두운 정치 판도가 광명을 찾아서 새로운 궤도로 진입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누가 뜻하였으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자 해공 신익희 씨가 투표일 10일을 앞두고 지방 유세 도중에 급서하고 말 줄을….  현행법상 대통령 후보를 다시 내세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부통령 당선이란 기대마저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대통령 후보로는 자유당의 이 박사와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뿐이었다. 그러나 당의 조직으로 보나, 인격으로 보나, 선거 전략으로 보나, 조씨는 이 박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진보당으로서는 민주당의 지지를 은근히 받고 싶어했다. 그래 서 부통령 후보인 박기출 씨를 자진 사퇴시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몹시 냉담한 편이었다.

  국민들이 약간의 반응을 보인 정도였다. 서울에서 나타난 신익희 씨의 압도적인 추모표 내지는 백지 투표는 차치하고라도, 국민의 일부는 이 박사에게 표를 줄 것이라면 오히려 조씨에게 주겠다는 반발적인 투표의 결과가 나타났다. 1952년 제2대 선거 당시에 조씨가 얻은 표에 비해 1956년 5·15 선거에 자신의 투표가 2, 3배가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약 1할이 이 박사에 대한 반발표가 아니었던가 하고 추측했다.

  대구는 야당 도시로 유명하지만 본래는 한민당의 극우계와 공산당의 극좌계의 근거지로 이름이 있던 곳이다. 공산 세력은 이미 북으로 쫓겨간 이상, 극우파의 세력이 우세를 보인 일도 있지만 대구에 갖고 있는 민주 세력을 자유당으로서는 승리를 위해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비록 대통령의 승리는 자신했지만 부통령에는 자신을 갖고 있지 못한 자자당이다. 우려한 대로 결과는 그렇게 나타나고 있었다. 관권과 금력을 동원했지만 도처에서 이기붕 씨보다 장 박사가 우세했다. 그러니 대구에서는 개표를 하나마나 장 박사의 압도적 우세가 뻔한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은 끝내 5월 17일 대구 개표 중단이란 불행사를 저지르고야 말았던 것이다. 자유당 간부가 내무 장관을 불러 사건을 조작하려 하자, 이에 내무 장관 김형근 씨가 칭병을 하고 자리에 눕자 차관을 불러 추상 같은 지령을 내린 것이다.

  개표를 하다 보니 예상대로 마치 자유당 선거전이 잘못된 반대 작용처럼 장 박사의 지지표가 무더기로 나올 정도였다. 당황한 자유당측에서는 개표장의 전기줄을 절단시켰다. 암흑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 이씨의 표를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민주당 놈들이 이기붕 후보의 표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들은 소리쳤다. 어두운 장내가 갑자기 전쟁터처럼 살벌하게 되었다. 자유당의 만행을 예상한 민주당 참관인들은 투표함을 지켰다. 그리고 이미 개표된 장 박사의 지지표를 끌어안았다. 그로부터 개표장은 외부와 연락이 아주 두절되다시피 했다.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뿐더러 누구 한 사람 감히 그 안으로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낮에는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밤에는 무시무시한 살인적 공포가 휩쓸었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데모크라시(민주주의)는 투표함 속에 있었다. 그 투표함을 사수하는 사람들의 것일 수밖에 없었다. 


 



 
  첫 발단은 이렇다. 5·15 총선거에서 설마 자유당이 참패하리라고 생각지 않은 저들은 다른 곳을 개표해 보다가 당황하고 말했다. 갈수록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표가 장면 후보한테 리드당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당으로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개표를 중단해서라도 다른 응급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 무렵 어떻게 해서 대구 개표가 그토록 뒤늦었는지 그것은 정치적 수수께끼로 되어 있다. 여하튼 개표가 남은 곳은 지방에서 무안이라는 곳과 대구 일원뿐이었다. 당황한 자유당으로서는 전체표가 많은 대구를 선택했다.
그때 대구 개표가 늦어지지 않았던들 다른 문제가 꾸며졌으리라. 아니 대구 아니었던들 투표함 사수는 도저히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승패의 기로에 선 민주당으로서는 우선 중진급 인사를 현지 대구에 급파했다. 제1진에 한근조, 김상돈, 현석호 제씨를 포함한 5, 6명의 인사가 갔고, 제2진에는 김영선, 이철승 씨를 포함한 청장년 당원 십수명이 대구에 도착하는 즉시 개표장에 접근하여 투쟁을 벌였다. 투표함 사수엔 과연 강팀이었다. 또한 개표장 안에는 김재권(金在權), 임문석(林文碩), 장영모(蔣潁模) 씨 등 대구의 야당 인사들이 극한 투쟁에 발벗고 나섰기 때문에 투표함 사수가 가능했던 것이다.

  현지에 파견된 민주당 간부들은 임씨 등과 더불어 사태를 수습할 것을 결
의했다. 경북 도지사를 만나 개표를 촉구하며 따졌으나 예상대로 속수 무책이었다. 이에 도지사를 붙잡고 시비를 해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로 대구 고등 법원장이며, 직접 이 선거에 실권이 있는 선거 관리 위원장인 김용식(金龍式) 씨를 만났다.

  "이봐! 이거 어떻게 하자는 거야!"

  김용식 씨는 한근조 씨의 후배인지라 화가 난 한씨가 마구 다그쳤다. 그러나 대구 선거 관리 위원장이라 하지만 당시의 사태에서는 전혀 실권이 없었다. 그는 한씨 앞에서 난색을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처지도 되지 못한 한씨는, 어떻게 실력 발휘를 하라고 소리쳤다. 김씨는 청렴 강직한 사람이었다. 마음이 착하기로 이미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다.

  "한 선배, 이거 뭐 어쩔 수 없이 일을 바로 고쳐야 하겠습니다."

  만 3일이 되는 무렵에 얼근히 술에 취한 김씨가 한씨를 찾아와서 그렇게 말을 했다. 한씨와 임씨는 김씨의 뒤를 따라갔다. 도수장에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일은 명명 백백하게 밝혀 내고 개표를 계속시켜야 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정확한 개표안을 내어 놓으시오."

  실권자 김용식 씨는 개표 위원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그러나 자유당측에서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이 사실을 자유당 대구 당 본부에 연락했다. 급히 달려온 자유당 간부들은 무례하게도 김씨에게 공갈과 직위에 대한 협박을 했다. 그러나 이미 각오한 그였다. 그러기에 술까지 마시지 않았던가. 그는 조금도 겁내는 빛이 없이 그들의 만행을 나무라는 것이 아닌가.

  독재가 만행하는 힘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국민의 원성이 점점 높아 가자 자유당은 할 수없이 국민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 무렵 이 박사가 마지못해 개표를 계속하라는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시간이 얼마였던가! 무려 장장 73시간이라는 기록을 내고 비극의 막 을 내렸던 것이다. 승리는 장면 박사에게 돌아오고….

  개선 장군이 되어 귀경한 한씨는 즉시 장 박사를 만났다. 장 박사는 한근조 씨의 손을 덥썩 움켜 잡았다.

  "한 형! 죽을 고비에 빠져 들었다가 무사히 넘기었소. 한 형! 이게 민주주의의 투쟁이오."

  장 박사도 한씨도 승리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싶었으리라. 


 
4


 
  한편 대통령 후보 해공을 잃은 운석은 5·15 정 부통령 선거의 개표를 앞두고 신변에 무슨 일이 닥쳐올지도 모르고 또 수사 기관들에게 미행하는 기미가 보였으므로 당분간 명동 성당에 머물고 있었다. 개표가 시작되면서 노 주교가 쓰는 방 2층에서 개표 결과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성당 주변까지 수상한 청년들이 따라와 배회하기 때문에 불길한 분위기가 되는 느낌이다. 이때 침대를 옆에 놓고 전국의 개표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며칠 사이에 대구 개표 중단 사건이 표면화했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끝내 장 박사는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권의 승리가 아닐 수 없었다. 갖은 수단과 시련 속에서 승리의 영광을 차지한 장 박사를 찾으러 기자들이 아무리 숨가쁜 취재전을 벌여도 그 행방이 묘연했다. 곧 장 박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부통령에 당선된 장 박사의 사진을 직접 찍은 측근자 모씨가,

  "기자 회견을 서둘러야 합니다."

  "그럼 먼저 외국 기자들이라도 만나야겠어."

  "장소는 어디로 하리까?"

  "노 주교 응접실에서 그냥 하지."

  그래서 외국 기자 회견이 명동 성당 노 주교 응접실에서 개최되었다. 그것이 세상에 뉴스의 빛을 본 처음의 회견이었다. 이렇게 되니 국내 기자단에서 크게 말썽을 일으켰던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명동에서의 기자 회견을 마치고 나서야 장 박사는 비로소 자택으로 귀가했던 것이다. 


 



 
  대구의 주가가 상승 일로…. 그것은 대구 개표 중단 사건의 후일담이다. 4년 뒤 2·28 대구 학생 데모와 함께 민권 투쟁사상 대구의 명성을 가볍게 평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은 제주도로, 학생은 대구로!"

  과연 민권 승리의 영광, 야당 기질의 도시가 대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