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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운석 시대 7대 사건 - Ⅳ. 부통령 피격 사건

 운석 장면 박사 생존 시에는 하고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 많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장 박사가 몸소 체험했던 가장 벅찬 정치적인 사건들을 사건별로 간추려 드라마틱하게 엮어 본다.

 픽션 냄새를 풍긴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사실 위주임은 물론이다. 세상에 잘못 알려진 허위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데 기여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한 역사적인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정치 비화를 추적하면서 해명키로 한다.

 이 운석 시대의 대사건은 원칙적으로 사건 발생의 순위이며, 그 내용에 대한 책임은 운석 기념 출판회에 있음을 밝혀 둔다.

1 

  1956년 9월 28일. 서울 시내 명동 시공관 주변에는 많은 시민들의 인파가 들끓었다. 이날 하오 2시 38분쯤이다. 페인트가 벗겨져 얼룩진 동편 비상구가 슬며시 열리는 듯하면서 누군가의 열띤 음성이 확성기를 타고 밖으로 흘러나왔다.

  우레와 같은 장내의 박수 소리 그리고 잠시 후 안경을 낀 훤출한 키의 50대 신사가 단상에서 내려오고 있다. 몇 걸음 지나쳐 신사가 밖으로 오른발을 내딛으며 퇴장하려는 순간, 그와 더불어 나오는 왼손….

  "탕! 탕!"

  순간! 하링톤 권총의 굉음이 파란 9월 하오의 하늘을 날카롭게 찢어 놓았다. 총성에 놀란 말들이 포도를 차고 앞발을 번쩍 들며 힝힝거렸다.

  "뭐얏!"

  "누구냐!"

  "잡아라! 잡아라!"

  시공관 안팎이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뛰어가고 왔다. 밖으로 나오려던 신사는 잽싸게 안벽에 등을 붙였다. 왼손에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하얀 와이셔츠가 금방 시뻘겋게 물들었다.

  "각하!"

  짤막한 체구의 사내가 손수건을 꺼내어 피가 흐르는 손을 감쌌다.

  "괜찮아! 괜찮아!"

  신사는 오히려 당황하여 달려온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신사는 다시 단상으로 올라가 선혈이 낭자한 손을 번쩍 들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내 걱정은 마십시오. 계속하여 대회를 진행하십쇼."

  차분한 음성이 마이크를 타고 낭낭하게 퍼져 갔다.

  "만세! 장면 박사 만세!"

  "부통령 만세!"

  "민주당 만세!"

  실내에 빼곡히 퍼진 들끓는 함성으로 육중한 건물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2


  1956년 5·15 정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 박사는 대통령 후보를 잃은 채 이 나라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기쁨과 슬픔이 엇갈리는 심정으로 8·15의 취임식을 마쳤다. 비록 해공은 갔지만 부통령에 장 박사가 당선됨으로써 사실상 선거에 승리한 민주당은 취임 한 달이 지나 전당 대회를 소집키로 했다.

  9월 28일, 드디어 시공관에서 전당 대회를 열었다. 전국 각지의 지구당 대표들이 아래위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단상에는 당 최고 위원을 비롯한 중앙 당부의 고문들이 둘러앉았다. 그런데 의당히 중앙석에 장 부통령이 나와 있어야 하는데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당원 여러분! 장 부통령께서 의당히 이 자리에 나오시는 것이 도리입니다만, 몸이 불편하시어 부득이 참석을 할 수 없다는 연락이 관저에서 왔습니다."

  곽상훈 대회 의장이 마이크를 통해 장내에 알렸다. 그러자 2층에 앉아 있던 어느 청년 대표가 벌떡 일어서며,

  "부통령께서 몸이 얼마나 불편하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부통령 각하를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워 왔습니다. 잠깐만이라도 우리가 싸워서 뽑은 부통령의 모습을 뵙고 싶습니다. 소원입니다. 누구를 뵙자고 올라온 것이겠습니까! 의장님."

  그는 부산 대표였다. 그의 말은 간절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 한 사람의 심정만이 아니라, 모든 지방 당원들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 그들이 자유당의 갖은 모략과 압박을 받으며 싸운 것이 누구 때문이었던가!

  "그렇다면 연락해 참석하시도록 해보겠습니다."

  의장은 흉흉한 정보가 있어 나올 수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여간 한근조 씨를 순화동 관저로 보냈다. 한편 장 부통령은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2시가 지났다. 어젯밤 한창우 씨와의 계획을 다시 한번 머리 속에 그렸다.

  순화동 관저에는 벌써부터 장 박사를 저격하리란 심상찮은 정보가 들어오고 있었다. 자유당의 그 음흉한 눈길이, 괴한의 총구가 이 전당 대회의 찬스를 놓칠 리 만무였다.

  그러나 장 박사는 어떻게 하든지 대회장에 나가 자기를 위해 생의 위험조차 무릅쓰고 선거 운동을 해준 전국의 당원들에게 감사와 격려의 말을 하고 싶었다. 간절한 심정이다. 그러나 벌써 어느 구석에선가 총구가 노리고 있지 않은가. 





  부통령 시절의 장 박사의 신변 보호는 치안국에서 정식으로 파견된 경호원 열댓 명이 와 있었다. 그런데 야당 소속인 장 부통령 신변 문제에 신경 과민이 될 정도의 정보가 연일 들어오는 것이었다. 취임 직후부터 암살 모의가 모측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거나 장 박사를 제거할 움직임이 일본 동경 모처에서 진척되고 있다는 등 매우 뒤숭숭한 나날이었다. 그에 따라 경호진은 퍽 긴장되어 있었다. 자연히 장 박사의 신변에 대하여 적지 않은 우려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갖은 음성적인 압력의 손길이 뻗쳐 오기도 했다. 정보원들을 파견시켜 부통령의 활동 상황을 늘 시찰하는가 하면 드나드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멀리 지켜서서 사진 찍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사람도 많다. 또한 갖은 정치적인 압력을 가하여 장 부통령과의 접촉을 죄악시하기까지 했다. 당시 보사부 장관을 하던 이모(李某) 씨가 장 박사 서거 시에 말하기를,

  "어느 정초에 순화동 부통령 관저에 장 박사께 세배드리러 갔었는데 그것을 사진 찍어 가지고 문제를 삼아 결국 보사부 장관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는 내용의 피해담을 털어놓은 바도 있다. 어떻든 당시 부통령 관저는 험악한 분위기였다. 드나드는 사람을 일일이 체크하고 정보원들이 늘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장 박사는 어떠한 고난이 와도 태연했다. 혼자서 사무 보는 방에 나와 사무를 보고 또 편지도 썼다. 공식적으로 나갈 곳도 많았지만 당 간부들이나 측근자들은 되도록 외부 활동을 만류했다.

  그런데 장 박사의 신변을 염려하는 정보들은 대개 민주당 당원들이나 측근 경찰들로부터 들어오게 마련이었다. 특히 세상을 발칵 뒤집다시피 한 1956년 가을의 장 부통령 저격 사건은 사건 전에 충분히 그 비밀 정보를 알고 있었다. 대개 어느 측에서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암살 모의를 하기 위하여 모측에서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도 미리 대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 간부들의 의견이 민주당 전당 대회가 열리는 시공관에 장 박사가 참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결정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 박사 자신도 이 문제에 적지 않은 고심의 빛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문제의 부통령 저격 사건이 발생하기 바로 전날 밤 11시쯤 해서 장 부통령은,

  "갖은 박해를 무릅쓰고 당 동지들이 싸운 결과 내가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 후 첫 전당 대회인데 지방에서 상경한 많은 당원들 앞에 인사를 해야겠어. 그런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라고 한창우 씨에게 자기의 고충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나가시면 틀림없이 당하실 겁니다."

  "글쎄, 그건 이미 기정 사실로 아는데, 전당 대회에 참석하면서도 당하지 않는 무슨 묘책이 없을까 모르겠군."

  "정 나가셔야 한다면 꼭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법합니다."

  이미 전당 대회엔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이 되어 있으니까 대회장에 미리 그 사실을 공표해 놓되, 아무도 모르게 연단 옆 비상구 쪽으로 재빨리 입장했다가 인사를 마치고 다시 재빨리 퇴장하여 자동차에 오르면 된다는 얘기였다. 그리 되면 노리고 있던 사람들이 당황하게 되고 그들에게 기회를 허용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한씨는 거듭 당부했다.

  "만일 정문을 사용하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겠으니, 당하지 않고도 소기의 일을 마칠 방법은 그것밖에 없겠소."

  그러고 나서 이튿날 비서들도 모두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장 박사가 공식적으로 시공관에 참석하지 않게 되어 있는 이상 신변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장 박사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히 여긴 한씨는 정치부 송원영(宋元英) 기자를 시공관 전당 대회 현장에 파견시켰다. 경향 신문사 사장실에서 마침 점심 식사를 하고 있노라니까 전화벨이 울린다.

  "한 사장님, 당했습니다."

  "아니 장 박사가!"

  "네, 방금 총소리가 두어 방 울렸는데 부통령이 큰 부상을 당한 것 같지는 않고 범인이 끌려가고 있습니다."

  매우 상세한 당시의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총을 맞은 장 박사가 다시 단상에 올라가 감격 어린 목소리로 인사말까지 태연하게 한다는 보고까지 들으며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 내심 생각했다. 어쨌든 장 박사 저격 사건은 의외로 인기를 정상에 올려놓은 느낌이 없지 않았다. 어느 측근자가 훗날 장 박사를 찾아가 담소하면서

  "장 박사, 안된 말씀이지만 이 사건으로 선전비 2억 환은 넉넉히 벌었구려!"

  하니까, 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4


  비서들도 대동하지 않은 채 소리 없이 장 박사가 대회장에 도착하자 장내는 갑자기 긴장감과 조용함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적인 것, 이내 박수와 만세 소리가 터지고 장내는 갑자기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그 열띤 환성 위로 장 박사의 격려와 위로의 음성이 힘차게 울렸다. 자기를 당선시키기에 피나는 노력을 한 당원들에게 단 몇 마디의 격려가 대가의 보상이 충분히 되지 않지만 간결하게 자기의 소신을 피력했다. 그리고 단 상에서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서 잠깐 숨을 돌리고 난 장 박사는 장내에 알리지 않고 천천히 하단을 했다.

  마침 아래층 중앙에 앉아 있던 중앙당 상임 위원인 김진택(金鎭澤) 같은 분은 이를 보고 사잇길로 빠져 문 앞에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문 가까이에 앉았던 강원도 대표 두 명도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힌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리고 장 박사가 문 밖으로 오른발을 내딛는 순간 밖에서 총성이 울렸다. 오른발과 더불어 밖으로 나갔던 장 박사의 왼손이 움찔하며 안으로 도로 굽히어 들어왔다. 또 한 발의 총성! 총알은 김씨의 배 앞을 스치고 강원도 대표가 일어선 바로 그 의자에 박혔다. 장 박사는 어느 사이엔가 안벽에 등을 붙였다. 왼손에서 피가 흘렀다. 바로 앞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던 김씨는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어 장 박사의 피 흐르는 손을 감쌌다.
장 박사는 소란한 장내, 흥분된 당원들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다시 단상으로 올라가 저격을 받은 왼손을 흔들었다. 환호성이 터지고 만세 소리가 천장을 울렸다. 한편 밖으로 뛰어나간 당원들이 저격범 김상붕을 잡아 연단 아래 꿇어앉혀 놓고는 치고 받고 했다.

  "죽여라! 죽여!"

  저격범은 용서를 할 수 없다. 흥분된 당원들은 김을 죽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만약에 죽인다면 배후의 규명은 물론, 오히려 이편이 불리하게 몰릴 것을 우려한 당 간부들은 당원들을 간신히 말렸다.

  사건 현장에는 의당히 나타났어야 할 내무 장관 이익흥(李益興)이 나타나지 않고 치안국장 김종원(金宗元)만이 달려왔다. 범인은 일단 경찰에 넘겨졌다. 


5


  자택에 돌아와 누운 장 부통령의 심정은 무거웠다. 해공을 잃은 설움, 외로운 야당 부통령으로서의 피격…. 착잡한 심정을 가누고 있는데 반시간 남짓해서 이기붕 의장이 맨 먼저 달려왔다. 장 박사 뇌리에 형언할 수 없는 의혹이 번득였다. 하필이면 약속이나 했던 듯이 만송(晩松)이 제일 먼저 찾아와 위로해 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장 박사는 오히려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여보, 만송! 정치라는 것, 이렇게 해야 한단 말이오!"

  아찔한 채 사색이 되어 버린 만송은 물러가기에 앞서

  "장 박사,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며 말꼬리를 흐리는 것이었다. 모측의 고위층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이덕신(李德信)이 김상붕과 최훈을 직접 하수인으로 택하지 않았는가. 정치성을 띤 사건이기 때문에 배후 관계는 복잡했다. 사건이 있고 나서 10여 일 후에 저격범의 형인 김상봉 씨가 장 박사의 측근자인 모 씨를 찾아와 눈물로 호소했다.

  "선생님, 제 동생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라니까 할 수 없이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위험까지 드리지 않을 각오는 했었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배후자는 나오지 않았다. 배후가 밝혀지지 않은 채 59년 1월 13일에 하수인 김상붕을 위시해서 최훈, 이덕신에게만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 후 60년 4 19 혁명으로 모든 배후가 밝혀졌다. 정치범으로 체포된 소위 백두산 호랑이란 김종원의 입으로부터 풀리어 나갔던 것이다. 어마어 마한 릴레이식 지령의 배후였다.

  그해 겨울 제2공화국 국무 총리가 된 장 박사는 서대문 교도소를 시찰 중 4년 전 자기를 저격했던 저격범들을 몸소 찾아보았다.

  "추운 데서 고생들 하는군."

  국무 총리이기 전에 독실한 신앙인인 장 박사는 따뜻한 사랑의 말로 그들의 고생됨을 위로하며 스웨터까지 전달했다. 3명의 죄수들은 너무나 감복해서 흐느꼈다. 스웨터를 받아 든 손이 속죄심에서 흐느끼는 어깨와 함께 떨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