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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운석 시대 7대 사건 - Ⅴ. 4·19 혁명

 운석 장면 박사 생존 시에는 하고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 많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장 박사가 몸소 체험했던 가장 벅찬 정치적인 사건들을 사건별로 간추려 드라마틱하게 엮어 본다.

 픽션 냄새를 풍긴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사실 위주임은 물론이다. 세상에 잘못 알려진 허위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데 기여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한 역사적인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정치 비화를 추적하면서 해명키로 한다.

 이 운석 시대의 대사건은 원칙적으로 사건 발생의 순위이며, 그 내용에 대한 책임은 운석 기념 출판회에 있음을 밝혀 둔다.


1

 창밖에는 새벽 안개가 짙게 내려 깔리고 있었다. 주위의 나무나 풀잎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주위가 고요한 새벽이다. 5시 30분. 그렇게 소란하던 하늘 밑은 안개 속에 조용히 숨쉬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님, 물러가겠습니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 안에서 그런 젊은이의 음성이 들려 왔다. 어딘가 모르게 비통함이 서리어 있었다.

 “가겠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젊은 육군 소위에게 그렇게 말했다. 가라는 대답은 아니다. 좀더 같이 있고 싶은 노인의 심정이다.

 그러나 청년 소위는 거수 경례를 하고 나서 절도 있는 동작으로 돌아섰다.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소위의 가슴은 무거웠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가슴을 무겁게 하는 것일까? 실탄이 장전된 두 자루의 권총 때문일까. 물론 그것도 예외로 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더 무거운 것은 내부의 고통인 것이다.

 밖은 아름답다. 시인이 아니라도 이 새벽의 아름다움에 심취할 수 있다. 그러나 청년 소위는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뚜벅뚜벅 새벽의 풀이슬을 군화에 묻혔다.

 36호실. 청년 소위는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소파에는 수심에 잠긴 부부와 젊은 학생이 소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년 소위는 권총을 꺼냈다. 순간 급작스럽게 검은 총구에서 불을 뿜기 시작했다.

 그 총성은 고요한 새벽 공기를 흔들어 놓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새벽 5시 45분이었다.
온 국민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이기붕 일가족이 경무대 36호실에서 자살을 한 것이다. 1960년 4월 28일의 일이었다.

 그들은 왜 자살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그들의 죄과는 자살로써도 다 씻을 수 없다. 그래설까? 아니다. 그들은 이제 성난 4월의 군중들 속에서 아무 데로도 탈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날인 27일 하오 2시 5분에 이 박사가 국무원 사무국을 통해 대통령 사임서를 정식으로 국회에 제출하여 이 박사가 경무대를 떠나지 않았는가. 이 박사는 또 왜 사임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역사의 페이지를 들추어 보지 않을 수 없다.

 
2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3‧15 부정 선거를 앞둔 2월 28일 대구에서 첫 학생 데모가 벌어졌다. 이를 시발로 한 데모가 전국으로 물결치듯 급파되기 시작했으니 3월 1일에 서울, 대전, 수원에서 학생들이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감행했다. 이어 8일에 다시 대전에서, 12일 부산, 그리고 13일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각기 본격적인 데모를 벌였다.

 “경찰은 학생들의 인권을 옹호하라.”

 “민주주의를 살리자.”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을 즉시 석방하라.”

 구호는 이렇게 시작하더니 점점 극한적인 것으로 비약하는 것이었다.”
 
 “부정 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

 “학생들은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학원의 정치 도구화를 결사 반대한다!” 등등의 삐라를 뿌리면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급기야 전국 방방곡곡에 파급되었다.


  3·15, 이날은 투표일이다. 여지껏 침묵을 지키어 오던 마산에서 제1차 데모를 했으니, 곧 마산 사건의 발단은 나아가서 4·19의 횃불이 된 것이었다.

  제1차 데모로 인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당하는 한편 몇몇 학생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리하여 행방 불명된 자는 거의 경찰이 학살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민심이 점점 흉흉했다. 그러자 4월 11일 목요일에 다시 제2차 데모가 폭발하고 말았으니 이는 곧 전국의 학생들의 호응을 받게 되었다. 4월 11일 한 낚시꾼이 해변에 앉아 고기를 낚아 내고 있었다. 그러던 낚시꾼은 깜짝 놀랐다. 시체 하나가 그의 눈앞에 떠오른 것이 었다.

  마산은 발칵 뒤집혔다. 그 시체는 다름이 아닌 제1차 데모에서 행방 불명이 되었던 마산 상고의 김주열(金朱烈) 군이 아닌가. 더구나 김군의 얼굴에는 흉탄이 박혀 있어 살해의 혐의가 짙어졌다. 도립 병원에 인계된 시체는 인수를 거부당했다. 거기서부터 격분된 군중의 데모가 시작되었다.

  "학살 경관을 처단하라!"

  "이승만 정권은 물러가라!"

  분노의 구호가 마산 시가지를 휩쓸었다. 김주열 군의 피살은 전국민의 분노를 샀다. 마산 사태가 한참 치열할 무렵에 이 박사는

  "공산당 선전에 속은 몰지각한 사람들이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그냥 둘 수 없는 일이다"

  라고 엉뚱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정부의 공격은 일방적이었다. 무조건 공산주의의 준동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허울 좋게 공산당에게만 뒤집어씌워 자기들의 부정을 은폐하려 들었다.

  4월 18일 드디어 서울에서도 대규모의 폭발이 야기되었다. 4천여의 성난 고대생들은 경찰의 폭력 저지선을 뚫고 서울의 중심가로 터져 나왔다.

  "부정 선거 다시하라!"

  "이승만은 물러가라!"

  정의의 젊은 함성이 서울의 하늘을 뜨겁게 끓었다. 전국 27개 대학의 학생 대표단의 회담에서 결의한 4월 19일의 서울 시내 전체 대학생의 봉기를 하루 앞당겨 4 18의 단독 데모에 돌입한 것이다. 평화로운 데모대가 천일 백화점 부근에서 폭도들의 집단 습격을 받게 되자 4·19의 결정적인 모멘트는 왔다.

  그리하여 날은 바뀌어 19일이 되었다. 상오 9시 30분경 서울 대학교 각 단과 대학 학생 만여 명은 노도와 같이 국회 의사당을 향해 진출하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고대 연대 성균관 동국 중앙 건국 등 전 대학생과 일부 고교생이 총궐기하여 서울의 중심가로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국회 의사당이 있는 태평로는 동서 남북에서 밀려오는 노도와 같은 데모대의 밀림지대였다. 또 학생들을 향하여 시민들은 뜨거운 환호의 박수를 보냈다. 한 떼의 학생이 서대문 쪽으로 향해 갔다.

  "이기붕을 죽여라!"

  이씨의 집으로 가 집을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하며 그에게 쌓이고 쌓였던 울분을 풀었다. 또 한 떼의 학생들은 이 박사와 담판을 짓기 위하여 경무대로 달려갔다. 경찰관은 광화문에 저지선을 폈다. 수십 발의 총성과 함께 수십 명의 학생이 쓰러졌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 않는 학생들은 드디어 저지선을 돌파하고 중앙청으로 향했다. 학생들은 성난 사자처럼 뛰고 달리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이에 호응했다.

  흥분의 도가니다, 4월 19일의 서울은.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성을 망각한 흥분이 아니었다.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리던 이 정권의 타도냐 말이다. 군중들은 어용 신문인 서울 신문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자유당이 또한 정치 깡패를 길러 낸 반공 회관에도 불을 질렀다. 또한 데모를 저지하려고 나왔던 소방차가 데모대에 빼앗기어 불길에 싸였다. 성난 군중들은 함성을 지른다. 그리고 정의의 봉기로 마침내는 부정의 산실과 어용의 전당이 타고 있다. 불길은 뜨겁게 서울의 하늘을 태웠다.

  한편 경무대로 달려가던 학생들은 해무청 앞에서 경찰관의 강한 저지를 받았다. 최루탄이 터져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쓰린 눈을 부릅뜨며 돌로 혹은 젊은 몸뚱이로 바리케이드를 부수었다. 총탄이 날아왔다. 누가 명령을 내린 것이냐! 무차별 발포가 시작된 것이다. 앞서가던 전우가 아닌 학우가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두려움은 물론 죽음조차 초월한 피끓는 사자들은 앞으로 앞으로 경무대를 향한 전진을 계속했다.

  "대한 독립 만세!"

  군인의 장렬한 죽음이 이에서 얼마나 더할 거냐. 학생의 죽음도 그에 못지 않았다. 태극기를 높이 펴 들고 달리던 학생이 쓰러졌다. 누구의 입에 선가 모르게 군가가 외쳐졌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그 자리에서 독재의 흉탄에 맞아 숨졌다. 아스팔트를 움켜 쥐며 숨진 넋들은 반독재 투쟁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각 대학의 의대생들이 어느 사이에 가운을 입고 부상자를 나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고는 부상자에게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사자는 앞으로 전진하는 법이다. 날아오는 독재의 총탄을 막아야 한다. 그래서 하수도 공사용 토관을 밀며 탱크처럼 전진했던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몰린 정부는 드디어 하오 3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 사령관에는 송요찬(宋 讚) 육군 참모 총장을 임명했다. 비상 계엄이 선포된 곳은 서울을 비롯해서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의 중요 도시 일원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사태는 수습이 될 줄을 몰랐다. 날이 차츰 어두워지고 완연히 주의가 어두워져서야 겨우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리는 마치 도로 공사장 같았고 건물 신축장 앞길 같았다. 거리의 어지러움은 말할 바가 되지 못한다. 이날 얼마나 많은 꽃다운 젊은 목숨이 스러졌는가 말이다. 백수십 명. 거기에는 나이 어린 국민 학교 학생들도 끼어 있었다. 또한 각 병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고 있는 4백 56명의 부상자들…. 비록 계엄령이 선포되고 날이 어두워서야 거리는 평온을 회복했지만, 이 가증스런 현실을 어떻게 묵과할 수 있단 말인가?

  이튿날 계엄하임에도 불구하고 데모는 계속되었다. 계엄군이 서울의 요소 요소에 배치되었지만 그들은 데모대를 저지하지 않았다. 데모대들이 탱크 위에 올라갔다. 계엄군들은 오히려 그들을 싣고 기꺼이 거리를 행진했다.

  파고다 공원에 세워져 있던 이 박사의 동상이 쓰러졌다. 그 동상은 목을 졸린 채 대로에 끌려다녔다. 시민들에 의하여 남산의 동상도 파괴되고 말았다. 이(李承晩) 왕국의 몰락이었다. 


3


  데모 군중들의 성난 목소리가 외쳐 댔다. 한편,

  "이 자동차 무슨 차요?"

  "부통령 찬데…."

  "아, 그렇습니까.…. 부통령 차다. 여기 길을 비켜 드려라."

  그리고는 환호성을 올렸다.

  "부통령 만세!"

  "민주주의 만세!"

  "장 박사 만세!"

  이상한 일이었다. '관'자가 붙은 차는 성난 군중들에 의하여 가차없이 파손되었다. 그러나 부통령 차는 어디에서나 대환영이었다. 장 박사 차라면 깍듯이 길을 내주며 민주 투쟁의 승리를 다짐해 주는 것이었다.

  밖에서 학생들의 절규가 한창일 때, 장 박사도 나가서 손이라도 흔들거나 데모대에 호응하여 적극적인 환호의 제스처를 아낌없이 표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부통령 공관에 모여 있는 민주당 중진 인사들의 만류를 물리칠 수 없는 장 박사였다. 이미 개인 행동을 하기에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으니 말이다. 데모대들이 순화동 부통령 공관에도 몰려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경무대와 너무나 판이한 장면이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는가. 얼마나 쓰라림이 컸겠는가. 학생과 시민들은 장 박사의 관저 주위에서 만세를 불렀다.

  "나, 나가서 저들을 격려해 줘야겠어."

  불안과 초조에 밤을 드샌 장 박사는 자기를 지지하는 국민들 앞에 즐거이 나서서 손을 흔들어 주고 싶어했다. 그러나 민주당 간부들과 경호원들이 이를 만류했다. 여지껏 그분의 생명을 노려 온 자유당 그의 주구들이 아직 있지 않은가. 만약 데모대 속에 그들이 끼어 어떠한 끔찍스런 일을 저지를지 모를 일이었다. 더욱이 국민들은 이 박사의 하야를 권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이 박사가 하야하면 그 권한은 의당 부통령인 장 박사가 대행해야 된다. 그때의 사태를 생각하면 자유당으로서는 가혹한 보복을 면치 못하리란 생각에 아직도 장 박사의 거세를 논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여기에 반하여 장 박사의 고민 또한 컸다. 비록 당이 다른 부통령이지만 일국의 부통령으로서 이 혼란한 사태를 좌시할 수 없으며, 부통령이란 직책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편 하루속히 이 박사를 하야시키는 것이 현 난국을 수습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박사가 쉽사리 대통령직을 물러날 리는 없었다. 장 박사는 대통령 궐위 시에 대통령 권한을 계승할 수 있는 자기가 있는 한 이 박사는 좀처럼 하야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잘못하다가는 자기를 선출해 준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될 염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독재 정권의 대통령을 그대로 계승하여 정권을 누려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먼저 물러나야 될 것 같아."

  장 박사는 그의 측근자들에게 비장한 표정으로 그러나 조용히 말했다. 이에 대하여 아무도 감히 찬반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 박사만 하야하면 학생들의 요구가 실현될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장 박사의 대통령 계승을 꺼리고 있는 이 박사. 장 박사는 드디어 며칠간의 고심 끝에 결심했다. 자기는 이 정권에게 보복할 뜻이 없으며, 또한 이 박사가 자기의 존재를 위험시한다면 발악적으로 이보다 더한 최악의 사태를 유발시킬지 모르므로 이 박사로 하여금 안심하고 하야 할 수 있는 촉진제가 되고자 했다. 민주당 중진들의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러나 장 박사는 자기의 심정을 말하고 그들을 납득시켰다.

  드디어 23일 상오 10시 30분 장 박사는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국회에서는 법적으로 사표를 처리할 권한이 없으므로 사퇴만으로 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이보다 앞선 상오 10시 15분에 3 15 부정 선거로 당선된 이기붕 씨가  "부통령 당선 사퇴 고려"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어 특별 담화문에서, (1) 보수 세력의 합동으로 정당의 개편, (2) 내각 책임제를 기조로 한 정치 제도의 개혁에 관해 이 박사와 이미 합의를 했다고 했다.

  부통령 사퇴서를 낸 장 박사는 11시 5분에 민주당 중앙 당부에서 내외 기자단과 회견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 박사의 하야가 내 최대의 목표입니다. 이기붕 씨가 주장한 보수 합동은 전혀 모르는 일이며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려면 현 국회를 해산하고 새 국회를 구성한 후 하여야 옳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26일 이 박사는 안심하고 대통령 사임을 성명하고 이튿날 사임서를 정식으로 국회에 제출하였으니, 더불어 4·19의 역사적 봉기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4

  허정(許政) 과도 내각이 서고 5월 말께 이 박사 부처가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권불십년. 이 정권의 독재가 막을 내린 것이다.

  결국 4 19는 학생 의거로 비롯되었지만 시민의 갈채 속에서 이룩된 시민 혁명이며 피를 뿌려 승리를 거둔 민권 혁명이다. 몇 가지 밝혀 둘 일이 있다면 야당인 민주당의 대(對)독재 투쟁이 학생 혁명을 선도했다는 것, 따라서 운석과 같은 야당 지도자의 힘이 컸던 사실과 이 박사가 물러나기까지에는 외세의 작용이 컸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증언한다. 4·19는 민주 혁명일 수밖에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