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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운석 시대 7대 사건 - Ⅰ. 부산 정치 파동

 운석 장면 박사 생존 시에는 하고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 많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장 박사가 몸소 체험했던 가장 벅찬 정치적인 사건들을 사건별로 간추려 드라마틱하게 엮어 본다.

 픽션 냄새를 풍긴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사실 위주임은 물론이다. 세상에 잘못 알려진 허위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데 기여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한 역사적인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정치 비화를 추적하면서 해명키로 한다.

 이 운석 시대의 대사건은 원칙적으로 사건 발생의 순위이며, 그 내용에 대한 책임은 운석 기념 출판회에 있음을 밝혀 둔다.


1


 항도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임시 수도에 긴장감이 휩쓴다. 부산만은 아니었다.

 
1952년 5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 남도 8개 군과 전라 북도 6개 군 그리고 전남의 7개 군 일원에 걸쳐 공비를 소탕하여 치안을 확보한다는 구실로 대통령에 의한 계엄령이 선포된 것이다. 계엄 총사령관에 이종찬 중장이 임명되고 영남 지구 계엄 사령관에는 원용덕 소장이 발탁되었다.

 원 소장의 명에 의하여 발표문이 거리에 나붙었다. 요약하면,

(1) 5월 26일 오전 10시 30분 한 대의 버스가 임시 중앙청 정문 앞 검문소를 돌입하므로 제지하고 승객의 신분증 제시를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2) 그들은 하차를 거부하여 부득이 견인차로써 70헌병대 차고로 연행했다.
(3) 검문 불응자는 모두가 국회 의원임.

 
이에 앞서 20여 명의 괴한이 경향 신문사를 습격하는가 하면 국회 의원에 대한 집단 검거까지 자행되었다. 26일 새벽 5시 30분경 정헌주(鄭憲柱), 이석기(李錫基), 양병일(梁炳日), 장홍염(張洪琰) 제(諸) 의원이 구속되고 49명의 국회 의원을 태운 국회 버스가 헌병과 CIC에 의해 불법 검색을 당하는 등 유사 이래 찾아볼 수 없는 가증스런 사태가 유발되었다.
 
 이날을 전후하여 검거된 국회 의원은 서민호(徐珉濠), 양병일(梁炳日), 장홍염(張洪琰), 이석기(李錫基), 정헌주(鄭憲柱), 이용설(李容卨), 김의준(金意俊), 임흥순(任興淳), 곽상훈(郭尙勳), 서범석(徐範錫), 권중돈(權仲敦) 등 11명이나 되었다.

 28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소위 “반민 국회 의원 성토 대회”와 국회해산을 요청한 괴청년 단체의 데모를 합법화한 치안 당국의 처사를 격렬히 비난하고, 김동성(金東成) 의원 외 17명이 제안한 계엄령 해제에 관한 동의안이 재석 136명 중 찬성 96, 반대 3표로 가결되어 구속 의원 석방 동의안이 정부에 제출됨으로써 국회와 정부와의 암투가 또다시 야기되었으니 소위 이름하여 “부산 정치 파동”의 본전(本戰)이다.

2


 이에 앞서 신익희 국회 의장은 사회봉을 쳐들어 “재석 163명 중 반대 143표, 찬성 19표, 기권 1표로 이 개헌안은 부결되었습니다” 하고는 의사봉을 내려쳤다. 그러자 의사당 안은 기쁨의 물결로 술렁거렸다.

 이날이 1952년 1월 18일이었다. 정부에서 내놓은 대통령 중심제, 양원제 그리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부결된 것이다.

 이를 전후하여 민국당을 위시한 원내 자유당이 이에 합세하여 큰 세력을 형성했으며 그들 야당은 따로 내각 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야당 의원들은 가결 법정인 수인 123명의 서명을 받아 4월에 정부에 회부하고 공고를 마쳤으니 이때부터 정부와 야당 간의 보이지 않는 암투극이 서서히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야당측은 자신 만만한 태도를 가지고 최후로 국제 구락부에서 18명의 의원이 회합하여 대통령 선거를 먼저 하고 개헌을 나중에 하는 선선 후개헌(先選後改憲)의 원칙에 합의했다. 한편 야당 의원의 단결을 다짐하는 뜻에서 부산 대신동 모처에서 대통령 선거 모의 투표를 하는 등 개헌 전략이 결실되어 갔다.

  6월 말까지 연기된 회기였지만 4월 24일 지방 의회 의원 선거 감시로 국회는 일단 휴회로 들어갔다. 국회 의원들이 지방에 가자 환영이라는 명목으로 집회를 소집해 놓고 개헌안에 서명한 국회 의원의 소환을 요구하는 규탄 대회로 변질되어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국회 의원들은 속속 부산으로 돌아왔다.

  정국에 불길한 암운이 끼는 4월 24일 뜻하지 않은 불씨가 당겨졌으니 그것은 전남 순천 평화관에서 서민호 의원이 신변의 위협에 못 이겨 육군 대위 서창선을 권총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서 대위를 총살한 서민호를 사형에 처하라는 삐라가 거리에 나붙는 가운데 국회에서는 서 의원의 석방안을 가결하여 불구속 문초를 받게 했다.

 연달아 일어나는 불상사 가운데 국회는 대통령 선거를 6월 2일에 국회에서 직선으로 실시할 것에 합의를 보고 내각 책임제 개헌안에 마지막 매듭을 짓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런데 누가 뜻하였으랴. ‘땃벌떼‧백골단’ ‘민족 자결단’ 등 정체 불명의 괴단체가 경남 도청 내에 있는 국회 의사당을 포위하여

 “반민족 국회 의원을 소환하라!”

 “국회를 해산하라!”고 외쳤다.

 이에 즈음한 5월 4일 이 대통령은 제2대 국무 총리였던 장 박사의 뒤를 이어 장택상 씨를 국무 총리로 임명했다. 불리한 사태를 유리하게 전개시키기 위해 이 박사의 측근인 장택상 씨는 이미 신라회라는 단체를 이끌어 가고 있었으며, 이 박사의 재선을 보장하는 대통령 직선제와 내각 책임제를 혼합한 발췌 개헌안을 추진하여 자유당의 이갑성, 김정실 씨 등의 삼우장파(三友莊派)와 합작하여 새로운 공작을 꾸몄다.

 
그러나 야당측의 착착 진행되는 개헌 운동과 6월 2일 선거라는 절박한 사태에 당황한 이 대통령은 5월 26일 돌연 이범석 씨를 내무부 장관에 임명하기 이르렀다. 청산리 전투 이래 이범석 장군의 철권이 유감 없이 발휘할 때가 온 것이다.

 
땃벌떼’ 등의 괴단체가 국회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부산 범일동 조방(朝紡) 내에 설치된 민의(民意) 동원 본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민의를 가장한 데모대가 동원되는 진기한 사태에 이르렀다. 넌센스라기엔 너무나 엄청난 정치적 장난이었다.

 
신변의 위험을 절감한 국회 의원들은 의사당 밖으로 감히 나오지 못하고 의사당 안에서 숙식을 하며 심지어는 의사단 내에 깡통을 갖다 놓고 용변을 보는 형편이었다.

 
이것이 소위 정치 파동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3



 “장면이 반정부 음모를 꾀하고 있다.”

 
“장면은 미국 병원선에 숨어 있다.”

 
부산 거리에 그런 말이 떠돌기 시작한 것은 소름 끼치는 정치 파동이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그러면 그것은 사실이었던가? 더욱이 장 박사가 돌연 사퇴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국민들의 의혹을 샀다. 그 의혹 속에서 유포된 말이 장 박사의 반정부 음모설과 미군 병원선에 도피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 과연 장 박사는 병원선에 도피하였던가? 또는 반정부 음모를 꾀하였던가?

 
사건은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1951년 11월에 파리에서 제6차 유엔 총회가 개최되었다. 제3차 유엔 총회에 이어 또 한번 수석 대표로 참석한 장 박사는 체류 2개월 만에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엔 총회가 끝나자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가는 것 같았다. 장 박사는 휴양을 요한다는 의사의 권고를 받았으나 즉시 귀국하라는 본국의 훈령에 의해서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때는 이미 국내가 정치 파동의 와중에 말려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귀국 도중 일본 동경에서 만난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권고로, 귀국한 뒤 부산 초량 국민 학교에 주둔 중인 미군 병원에 입원했던 것이다. 이때가 52년 4월이니 장 박사가 국무 총리직을 사임한 직후였다. 병원선이 아닌 초량 학교 이층 입원실이었다. 워낙 중태였기 때문에 장 박사는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두절한 채 요양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병석에 있는 환자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접촉이 허용된 사람이라면 측근자 세 사람뿐이었다.

 
돌이켜볼 때 제2대 국무 총리 재직 시에 장 박사는 이 대통령과 적잖은 트러블이 생겼다. 인사 문제에 이 박사는 고집 불통으로 측근자로서 아첨배에 가까운 사람들을 등용시켰다. 장 박사는 그로 인하여 난경에 빠졌다. 총리의 인사권까지도 가로채어 자기 파의 아첨 부류 인사들만 입각시켰다. 이때를 전후하여 한 보름 동안 참으로 험악한 트러블이 계속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국회에서는 이 박사를 갈아치워야 하겠다는 여론이 분분하니, 그는 드디어 부산 정치 파동이라는 것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국무 총리직을 사임하고 관저 2층에 누워 있는데, 어느 날 미군 대령 한 사람이 찾아왔다.

 
“리지웨이 장군 명령으로 왔는데 다름 아니고 박사님을 병원으로 모시라는 특명입니다.”

 
병원 입원을 권하는 말이었다. 입원을 주선하기 위하여 측근자들은 지프차를 대기시켰다. 그러나 당초 미국측에선 그들 측근자가 따라가는 것조차 극구 만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몹시들 궁금히 여기고 있었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경향 신문사 사장실로 연락이 왔다.

 
초량 국민 학교로 면회 와 달라는 사연이었다. 한창우 사장은 그 길로 부산 초량 국민 학교 내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원에 갔다. 장 박사가 보낸 패스포드를 수위실에 내밀자 미군 MP가 몸을 수색한다. 경비가 삼엄하다. 어려운 절차를 밟고 천막으로 가려 놓은 2층 방에 들어가니 거기 장 박사가 누워 있었다. 큰 철망으로 밖을 가려 놓아서 방은 컴컴했다.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인데 미군 병원이라 신변의 안전이 절대 보장될 법했다. 이렇게 한 두어 달 동안 감금 생활을 하며 장 박사는 몸을 치료받았다. 이따금 무쵸 대사가 다녀간 일이 있을 뿐 누구 하나 찾아올 사람도 없었고, 선우종원 비서실장과 이홍열 비서 등 이렇게 세 사람만이 패스포드를 가지고 드나들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장 박사가 갑자기 행방 불명이 되었다. 이튿날 한창우 씨만이 출입증을 가지고 간 곳은 부산 대신 중학교 2층 도서실이었다. 거기는 지키는 사람도 없다. 병원으로 쓰는 퍽 조용한 곳이었다.

 
“어떻게 여기로 옮겨 오셨소?”

 
“글쎄, 여기 오기 직전에 치안국에서 40여 명이 몰려와 빨갱이를 잡는다고 초량 병원을 일제히 뒤지는 통에 위기를 모면하고 여기로 오게 되었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그때가 부산 정치 파동이 조작되어 국제 공산당을 잡는다고 정부가 어수선을 떨던 그 무렵이다. 장 박사가 초량 학교에 은신중이라는 정보가 새어나간 모양으로 국제 공산당을 잡는다 하여 치안국 수색대원들이 몰려와 병원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매우 다급해진 순간이었다. 아래층을 다 뒤지고 2층으로 올라오는 수색대원들 앞에 나선 사람은 미군 대령의 계급장을 단 병원 원장이었다. 그는 말했다.

 
“여기 2층만은 공산당이 있을 까닭이 없소. 여기는 기밀실이라 절대로 공개할 수 없소. 절대로 안심하오. 여기에 공산당은 없소. 나를 못 믿겠소?”

 
이렇게 해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이날로 즉시 대신 중학교에 급송되어 온 장 박사였다.

 
병원에서 외부와 격리된 채 환자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국제 구락부 사건이 있었다. 그때 장 박사의 거처를 아는 사람이 한씨 한 사람에 불과했으므로 연락을 한씨가 도맡은 격이었다.

 
조병옥 박사가 장 박사로 하여금 국제 구락부에 꼭 나와야 하겠다고 간청해서 그 말을 전했다. 장 박사도 꼭 가 봐야겠다고 한씨에게 언약을 했다. 이에 한씨는 회합에 참석하여 장 박사가 참석하기를 기다렸으나 종내 그분은 나타나지 않았다. 회의는 장 박사를 기다리느라고 30분이나 늦게 시작하였고 회의 개최 도중 경찰들이 폭도로 화하여 갖은 소란을 부리며 재야 인사들의 집회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한 소란이 끝나도록 장 박사는 종내 나타나지 않았다.

 
한씨는 그 길로 장 박사가 누워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가 보니 넥타이를 맨 채로 장 박사는 침대에 누워 있지 아니한가.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어떻게 된 거요?”

 
“꼭 좀 나가 봐야 하겠다고 사정해도 원장이 안 내보낸 거 한참 승강이를 벌였다 못 나간다는 거야. 차도 철수시키고 나가려면 퇴원 수속을 하라는군 그래. 퇴원 수속할 때까진 안되겠다는 얘기군.”

 
“그럼 이제 퇴원해도 괜찮겠소? 그럼 어디 방이라도 하나 구해 드릴까요?”

 
“그렇게 해야겠어. 병원 생활 지긋지긋하오. 내 몸도 이제 다 나았어.”

 
“그러면 한 이틀쯤 여유를 주오.”

 
“일주일 정도까진 내가 기다리겠어.”

 
막상 장 박사는 총리 관저를 내놓은 뒤로 갈 데가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부산에 피난 중인 경향 신문사 근처에 있는 오류정이라는 요릿집 이층에 빈방 둘이 있어 이를 계약하고 전세를 얻고자 했다.

 
“그런데 참 누가 오우?”

 
“국무 총리 지낸 장면 박사….”

 
“아이, 그럼 못 받겠수.”

 
주인의 안색이 달라지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국제 공산당으로 지목받은 장 박사는 이제 올 데 갈 데가 없게 되었다. 결국 범일동에 있는 한씨 집 2층에서 1년 반 남짓 은거 생활을 장 박사는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신변의 위협을 느껴 그분은 범일동 성당에 주일 미사 갈 때에도 주의했고, 그런 생활이 반년쯤 지나게 되니 그해 초겨울쯤에 두려움은 덜했으나 결과적으로 세상에 큰 오해를 남기고 말았다. 주로 독서와 저술에 몰두했는데 사건의 조작 속에 휘말려들어간 장 박사로서 당시에 거처를 분명히 밝힐 입장이 못 되었다.

 
이걸 가지고 세상에선 장 박사가 병원선에 도피하여 정치 음모를 꾸민 것으로 떠들어댔던 것이다. 그 시절에 한근조 씨 같은 분이 매일 장 박사를 만나러 드나들곤 했다. 장 박사 수난의 시절이 이렇게 남겨졌던 것이다. 2층에 방이 둘 있어서 큰 방을 장 박사가 썼고 작은 방을 비서들이 쓰면서 같이 생활했다.


4

 소위 국제 공산당 사건이란 어마어마한 허위 날조의 사건으로 항도 부산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어 정권 연장의 각본을 연출하기에 바쁜 정치 파동의 계절….

 
하루는 선우 비서실장이 밤늦게 장 박사를 찾아왔다. 장 박사와 잠자리를 같이하면서,

 
“박사님, 또 무슨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나한테?”

 
“네, 그리고 저네들이 지금 저를 잡으려고 혈안이 됐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침통했다.

 
그 무렵 갈수록 신변의 위험을 느낀 선우 비서실장은 장 박사의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긴 했지만, 대신동의 어느 하꼬방 집에 있다가 영도에 있는 대신학교 한 신부를 찾아가 교실 하나를 빌려 비밀리에 거기에 숨었다. 선우씨는 이미 조금도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었다. 밖으로 한 발만 내딛었다가는 체포되고 그러다가 목숨마저 보전키 어려운 위기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실 벽을 이중으로 만들고 그 사이에 선우씨가 숨어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 커다란 달력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달력인 동시에 비밀실 문의 역할을 했다. 무려 3개월 간이나 칩거 생활을 했다.

 
장 박사는 자신의 일보다도 선우씨의 신변 걱정을 매일 했다. 장 박사는 몇몇 측근자와 의논하고 협조를 구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한씨에게 “여보, 선우가 위험해. 어떻게 외국으로라도 당분간 도피시키는 게 좋겠어. 저들이 단서를 만들어 음모를 꾸미고 있단 소식인데…. 위험해.”

 
그러나 한씨에게도 감시의 눈이 항상 번득거리고 있어 자신은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너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 배를 매수해라” 하고 한씨는 처남한테 부탁했다. 처남 정식씨는 3개월 만에 일본인 선장을 매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한씨의 비서인 김규성 씨에게서 군표(軍票) 5백 달러를 받아 쥔 선우씨는 자기를 버리는 조국을 등지고 현해탄의 파도 위에 몸을 띄워 보냈다.

 
매수한 선장만 아는 극비였다. 그러나 현해탄을 다 건너가기 전에 선원에게 발각되어 선우씨는 오무라(大村) 수용소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장 박사와 한씨는 몹시 걱정했다. 그렇다고 귀추를 두고 볼 수 만은 없었다. 한씨는 신문사 사장실에서 고베의 어느 신문사 일인 기자를 만나 두어 시간 이야기하는 사이에, 선우씨의 석방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일인 기자가 귀국한 지 1주일 만에 선우씨는 오무라 수용소에서 나와 무사히 일본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5


 한국 정치 사태의 혼란에 대해 유엔 한국 부흥 위원단이 이 박사에게 경고문을 냈다. 이에 대해 이 박사는 6월 2일, “검거된 국회 의원은 공산당과 음모하여 정부를 번복하려는 혐의 때문에 구속되었으며 수사에 의하여 이 의심이 해소될 때까지 석방할 수 없고, 계엄령은 순수한 군사적 이유에서 선포된 것이며 후방의 치안이 만족할 정도로 확보될 때까지 해제할 수 없다”고 버티었다.한편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도 주한 미 대사관을 통해 6월 3일 하오 2시에 이 박사에게 각서를 전달했다.
 
 “만약 한국 대통령과 국무 총리가 현재의 정치적 위기를 완화할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한국은 위험한 정세에 부딪칠 것이다”라고 하며, 유엔은 한국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귀한 병력과 막대한 자재를 보내고 있다고 부언하였다.

 
그러나 통치자는 일방적인 뱃심으로 차가운 반응만 보였다. 이 대통령은 국내외의 정세는 아랑곳않고 오직 자기의 정권 연장에만 혈안이 되었다.

  
더욱이 6월 7일,

  
“한국의 행정부와 국회 간의 분쟁으로 인한 정치 위기를 전체적인 방법으로 사용함은 민주의 기본권을 파괴할 우려가 있으므로 유엔은 이를 주시하고 있으며 정당한 방법으로 조속히 해결할 것을 바란다”는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 총장의 각서에 대하여,

  
“간접적인 정보로 한국 정세를 마음대로 판단함은 유감이며 확실한 증거에 의하여 용의자를 체포함은 정당한 것이다”라고 이 박사는 오히려 공박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국내외의 사태가 이렇듯 갈등으로 발전되는 동안 이 박사를 지지하는 52명의 국회 의원은 “부패한 것으로 생각되는 국회와는 함께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퇴장함으로써 사태는 점점 어두운 현실을 낳게 했던 것이다.

 
국회 의원 총수인 183명 중 12명은 구속되고 20여 명은 무단 체포를 두려워하여 피신하고, 52명이 퇴장하니 국회 성원을 이루지 못한 연일 휴회로 공전만 계속되어 국회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임기의 만료가 가까워지고 국내외의 정세에 몰리게 된 이 대통령은 할 수 없이 국회 재개 성명과 더 이상 국회 의원을 체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국회는 가까스로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로써 정치 운동은 일단락이 되었으나 대통령을 직선제로 하는 발췌 개헌안의 통과를 보아 결국에는 장 박사 중심의 민주 세력이 후퇴하고 이 박사의 뜻대로 되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