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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다만 하나라야 한다.
다 같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는다면서 이편 교회에서는 이렇게 믿고 저편 교회에서는 저렇게 믿고, 또 같은 교회 안에서 이 목사는 이렇게 가르치고 저 목사는 또 달리 가르친다면, 이런 교회는 신앙의 일치가 없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
교회가 하나라 함은 교회의 신도가 다 같은 교리를 믿고, 다 같은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고, 서로 일치 협동하여 한몸과 같이 한 회(會)를 이루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교회를 창립하신 그리스도 자신께서 신자들 사이에 신앙과 통치가 일치하기를 요구하셨나니, 이것은 성서 여러 곳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수난하시기 바로 전날에도 기도하시기를 “나는 이 사람들(제자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요한 17, 20-21) 하셨다.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명이 성부께로부터 나왔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가 된다. 마치 당신께서 성부와 그 본체질로 합하여 온전히 하나이심과 같이 제자들도 그 신앙에 있어서 완전히 일치되기를 기도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기도를 성부께서 언제든지 꼭 들어주실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성 바오로는 이교와 이단을 살인범과 우상 숭배와 같이 여겨 “이런 짓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갈라 5, 21)라고 단언하였고, 에페소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신앙이 일치하여야 할 이유를 말하기를,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 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 3-6) 하였다.
즉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예배하는 하느님은 여럿이 아니고 다만 하나이다. 또 믿고 인정하는 구속의 중개자도 여럿이 아니고 다만 하나이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성령도 여럿이 아니고 다만 하나이다. 우리가 희망하는 하늘 나라도 여럿이 아니고 다만 하나임과 같이 우리가 또한 다만 하나인 신앙을 받들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신앙상 일치도 필요하거니와 교회 통치상 일치도 또한 절대로 필요하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를 말씀하실 때에 한번도 복수 명사를 쓰신 일이 없었다. 즉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마르 16, 18) 하셨지, “내가 여러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일은 없다. 이것은 예수께서 당초에 교회를 세울 때 서로 충돌되는 여러 교회를 세우거나 또는 이를 용서하실 의향이 계신 것이 아니고, 도리어 모든 신자들이 일치로 단합하여 한 사람의 수령 통치하에 조직되어 있기를 의도하신 것이다.
교회는 유형적이고 세상에 살아 있는 신도들로 성립된 것인 이상, 이를 통솔하는 데도 반드시 유형적인 으뜸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에 보면 교회를 ‘나라’에 비하였나니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가 1, 33) 하였다. 현대 문명한 나라에는 반드시 한 사람의 원수가 있고, 몇 개의 정부가 있고, 국민이 다 같이 지킬 일정한 법률이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도 한 개의 정신적 왕국인 이상 또한 반드시 한 사람의 으뜸이 이를 통치하고 신자들은 다 같이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 따라서 그 교회 통치의 형식이든지 신자가 지켜 갈 법률이든지 반드시 일정한 것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갈라져 싸우는 나라’이니,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한다”(마태 12, 25).
그리스도는 당신 교회를 ‘양의 우리(檻)’라 부르사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요한 10, 16) 하였다.
이 ‘양의 우리’처럼 교회의 유일성을 적절하게 형용한 비유는 없을 것이다. 양이란 짐승은 항상 무리를 지어 있어서 잠시라도 서로 떠나면 어서 바삐 돌아가 다시 한 무리가 되기까지는 견디지 못하는 성질을 가졌다. 언제든지 같은 길을 따르고, 같은 풀밭에서 먹고, 같은 목자의 소리를 좇으며 낯선 자의 소리가 들리면 놀라 달아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우리 안의 양인 신자들도 다 같은 성사와 다 같은 생명의 양식(聖體聖事)을 받고, 다 같은 신앙의 법칙으로 천국에 이르는 지침을 삼고, 한 사람의 최고 목자의 소리를 듣고 좇으며 수상스런 거짓 목자를 경계하여 피할 것을 말씀한 것이다.
교회는 또 사람의 ‘몸’에 비유되었나니, “사람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가 있고 그 지체의 기능도 가각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수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로마 12, 4-5)라고 성 바오로는 말하였다.
실로 사람의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어 모두 머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머리가 한번 명령을 내리면 수족은 즉시로 움직이고 입은 곧 열린다. 이와 같이 교회도 여러 지체로 되어 있어 그 지체는 다 같이 가장 높은 머리와 연결되어 그 명령하는 대로 행동해야 되는 것이다.
교회는 ‘포도나무’에도 비유되었나니, 포도나무는 아무리 널리 무성할지라도 그 줄기와 넝쿨이 반드시 어미 그루터기에 연결되어 그 즙액을 흡취하여 생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교우들도 모두 한 나무 줄기에 연결되어 그 양분을 받아 자라고 발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뜻이다.
끝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묵시 21, 2)라는 아름다운 칭호를 받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다만 한 사람의 아내만 인정하는 이상, 이 ‘신부’의 비유는 오로지 교회가 하나밖에 있지 못할 것을 명백히 가르치는 것이다.
천계의 성경 말씀을 잠시 여기서 우리의 상식만으로 생각하여 보더라도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서로 반대되는 여러 교회를 세우셨을 리가 만무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은 절대로 다만 하나인 진리 그 자체시다. 그 유일 무이한 진리 자체인 하느님께서 어떤 교파에게는 삼위 일체를 가르치고 다른 교파에게는 일위 일체를 가르치고, 이 사람에게는 예수를 하느님으로 예배하라 가르치고 다른 사람에게는 하느님은 아니고 다만 위대한 인격자로 존경하라고 가르치실 수가 어찌 있으랴. 이런 일은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도 할 리가 없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인류에 대한 당신의 지극한 사랑을 표시하시기 위하여 당신 전지로 계획하신 모든 사업 중에도 제일 큰 사업인 교회를 건설하시는데 어찌 서로 다투고 싸우는 상반되는 여러 교회를 세우셨으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질서가 아니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1고린 14, 33).
물질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은 다 정연한 순서에 의지하여 보존되고 있다. 태양계를 보더라도 여러 혹성은 그 종축을 자전하는 동시에 그 중심 세력인 태양의 영향을 받아 놀랄 만한 속도로 일정한 궤도를 달려가고 있다. 정신계에 있어서도 또한 이러한 질서와 일치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란 전능하신 하느님의 크나큰 계획이며 인류에 대한 지선 지애의 발로이다. 그 신자들이 다 같은 가르침을 받고 같은 통치 기관을 인정하고 이에 충실히 복종할 것을 원하신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당연한 것이다.
눈을 돌려 가톨릭 이외의 교회를 살펴보자.
우선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신앙으로 보아 일치되지 못한 것을 우리는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통칭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실상은 서로 대립한 여러 교파를 합하여 부르는 것이다. 이 여러 교파는 다만 사소한 점에만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신앙상 중요한 점에 있어서도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각파의 신조를 일일이 점검하여 보면 일목에 분명히 알 수 있나니, 그리스도의 교회에 여러 교파가 있어서 서로 반대하고 공격하는 현상은 그리스도 교회의 위신을 손상하고, 외교인을 감화시키는 데 큰 지장이 되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다만 각 교파가 서로 신앙을 달리하였을 뿐 아니라 같은 교파에 있어서도 서로 의견을 달리한 분파가 대립하여 형제 싸움을 하고 있는 현상이다.
감리교에 남북파가 있고 장로교에도 남북파가 있으며, 보수적 색채가 농후한 영국 감독 교회도 의식파·고교회·저교회로 나누어져 있으며, 또 같은 파에 속한 신도들도 개개인이 그 신앙을 달리하고 있는 예가 너무나 많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교리뿐 아니라 그 통치 기관과 교회 규칙으로 보더라도 실로 천차 만별이다. 영국 교회는 국왕을 두령으로 삼고, 어떤 교파에서는 감독·장로·집사를 필요한 교직으로 인정하고, 어떤 교파에서는 장로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어떤 교파에서는 이런 모든 교직을 다 불필요하다고 배척한다.
그러면 신앙과 통치 기관의 완전한 일치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오직 가톨릭 교회에서만 볼 수 있다고 우리는 대답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전세계 3억 6천만의 가톨릭 신자들은 한 하느님과 한 신앙과 한 세례와 한 신조를 믿고, 다 같은 성사를 받고, 다 같은 제대 앞에 부복하고, 다 같은 교황에게 정신적 존경을 바치고 있다. 신앙과 통치의 일치는 가톨릭 교회의 생명이라 할 만치 귀중한 것이니, 만일 신자 중에 부당히 신조의 한 가지만이라도 믿지 않는다든지, 또는 법다운 교회 수령에 복종치 않는 자가 있어 그 훈계를 받지 아니하면 결코 교회 안에 머물러 있기를 허락치 않는다. 죽은 나뭇가지는 썩 베어 버린다. 썩은 지체를 아끼다가 그 독이 주요한 부분에까지 침범하여 들어가서는 안된다.
영국 왕 헨리 8세가 그 왕비 카타리나와 이혼하고 궁녀 안나 보렌을 맞아들이려 하였을 때, 만일 저의 부당한 소청을 거절하는 날이면 온 나라가 교회를 배반하고 떠날 것은 누구나 다 미리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한 걸음도 가작(假作)치 않고 단연 저를 파문하고 혼인이란 신성하여 절대로 이혼을 허락치 못할 것을 명백히 하였다.
독일 필닝겐 박사가 완강하게 교황의 무류성을 부인하였을 때에도, 교회에서 만일 엄하게 처치하면 그의 명성에 끌려 가톨릭 교회를 떠나 이교에 빠질 자가 많을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나, 교회에서는 조금도 주저치 않고 단연 저를 파문하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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