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간의 독재에서 벗어난 전국민은 새 민주당 정권에게 큰 기대를 가졌다. 자유당 치하에서 억압되었던 자유가 민주당 정권에서는 그 공약한 바를 지켜 완전히 허용될 것을 국민들은 바라고 있었다. 사실 민주당 정권은 이 공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자유를 누리려는 국민의 의욕을 막을 수 없었다. 또 막아서는 안된다.
민주당이 4월 혁명의 선도적 역할로 그 길을 닦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직접 혁명의 주체가 되어 정권을 쟁취하거나 이양받은 것과는 구분된다. 이것이 국민에게 강력한 시책을 강구하지 못한 이유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경찰은 4월 혁명 때 발포자라는 좋지 못한 인상과 부정 선거의 주구라는 누명을 벗지 못한 채, 국민으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던 관계로 처음부터 강력한 치안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과분한 자유를 얻은 각 개인과 단체는 먼저 언론계를 비롯하여 제각기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가 하면, 노동 단체를 위시한 각 단체의 시위가 혼란을 끝없이 조장시켰다. 4‧19 이후 누가 정권을 잡아도 이러한 혼란을 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자유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총칼로 억압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그렇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부정 선거 원흉과 발포자에 대한 처형에 이르기까지 피해자인 국민들은 강경히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며 음으로 양으로 위정자를 위협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여건이 우리에게는 불리한 형편이었다. 제2 공화국은 수난과 진통의 불연속선이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는 국민 앞에 내건 공약을 지키고, 또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가운데 점차 질서를 유지한다는 기본 방침엔 끝내 변함이 없었다.
야당 시절의 오랜 체험을 통하여 우리는 피치자(被治者)의 입장과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정권의 악착스런 탄압과 박해를 받아 본 우리이니, 어떠한 사태하에서도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정치에 임했던 것이다. 그에 따른 고충이 다대했음은 더 말할 여지도 없다. 국무 총리 생활을 통하여 나는 새벽 2시 전에 취침해 본 일이 별로 없을 정도로 성심껏 최선을 다하여 무슨 일이든 잘해 보려고 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경제 안정과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제반 준비가 갖추어지고, 그 실현 단계에서 시간을 얻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작은 집안 살림도 아닌 나라 살림이 단시일 내에 안정되지는 않는 것이었다. 몇 달만 더 계속되었어도 국가의 기틀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기회를 허용하지 않고, 집권한 지 불과 18일만에 정부를 전복하려고 갖은 음모와 갖은 계략을 꾸민 사람들에게 내가 이제 와서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민주당 정권 8개월을 통하여 역사에 두드러지게 나타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부패했고 무능한 것이 우리의 본질이었다면 군사 정변을 당하여 마땅했을 것이다. 우리가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워 5개년 계획을 성안하고, 그 실천을 위하여 총력을 집결할 만한 정치 안정기에 민주당은 좋지 못한 인상만 남긴 채 종언을 고하였다.
여기서 민주당이 시작해 놓고서도 미처 실현을 보지 못한 채 좌절되고 만 몇 가지 시책을 말한다면 약자의 변명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거니와, 그렇다고 사실을 밝히지 않고 넘어가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을 듯하여 약간의 해명을 해두려 한다.
5개년 계획에서 농촌 고리채 정리는 그 구상이 자유당 말기에 조금 비쳤던 것이 사실이나 구체적 초안을 정비한 것은 민주당 내각이었다. 그것을 곧 실시하지 못한 것은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인데, 군정(軍政)에서 이 초안 그대로를 아무 뒷받침 없이 내밀다가 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만 것이다. 좌우간 우리 농민들을 위하여 애석한 일이다. 우리는 5개년 계획의 초안을 4월에 이미 끝내고 있었다. 비밀리에 성안하여 발표할 생각이었는데, 그만 사전에 신문에 발표가 되었던 것이다. 1961년 4월에 나온 신문들을 보면 민주당 5개년 계획에 대한 명세서가 밝혀져 있을 것이다.
국토 건설 사업이 1961년 봄에 착수되어 새로운 희망을 약속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대미 관계를 원활히 하여 외환 정책의 기초를 굳건히 하였다. 김 재무 장관으로 하여금 막대한 액수의 달러를 원조 받아 왔건만, 뒤에 박 정권은 외유 기타의 명목으로 어떻게 낭비했는지 내가 알 바 아니다.
민주당 정권은 자유의 시련을 일선에서 겪어야 했으며, 특히 4월 혁명의 여파를 수습하는 데 많은 시간을 충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떠한 정권이 출현했다 하더라도 4‧19 이후의 격류 속에서 수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 나라 발전을 위한 많은 계획을 세우고 민주당 정권이 발전의 씨를 뿌렸건만 우리에게 운명은 가혹했다. 결과적으로 자유 민주주의의 값진 시련을 우리는 육신으로 체험했으니, 제2 공화국을 이끌어 온 나로서 오직 하느님 앞에 경건한 감사와 사과의 기도를 드린다.
우리의 잘못으로 주어진 정권을 빼앗기고 군정이라는 어려운 과정을 국민 모두가 맛보게 한 데 대하여 국무 총리직에 있었던 나로서 거듭 자책을 느끼며 사과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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