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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6·25 동란과 워싱턴 - 4. 전세계에 방송된 울분의 연설


전세계에 방송된 울분의 연설


 
전황은 날로 불리해 가고, 국군은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했다. 나는 유엔과 미국 정부에 매달려 7월 한 달을 바쁘게 보냈다. 소련은 최초에 꿈꾸던 안이한 한국 점령이 의외에도 유엔 궐기에 부닥쳐 안보 이사회의 보이콧이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이제는 정략을 바꿔 8월 회의에는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8월 1일,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인 소련 대표 말릭이 이사회에 출석했다. 그는 의장석에 앉더니 대뜸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 이사회의 그동안의 모든 결의가 모두 무효임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의 주장인즉, 안보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또 상임 이사국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중공 대표가 없는 동안에 통과된 결의안은 하나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회의에도 옵서버 자격으로 자리 잡고 앉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소련이 불참하는 동안 줄곧 안보 이사회에 참석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자는 끝내 나의 착석을 거부했다. 독설가 말릭은 그의 독특한 억설로 기세를 올리면서 “6·25 동란은 북괴군의 남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한국군의 북침”이라고 괴변을 늘어놓으면서 미국이 한국군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우겨대는 것이었다. 그는 덜레스 씨가 38선 시찰 때 찍은 사진을 어디선지 입수해 가지고 제시하면서, 그가 북진 침략의 지령을 내리는 광경을 좀 보라고 하면서 그 책임을 거꾸로 미국에 뒤집어씌우려고 들었다. 나는 소련 대표의 이런 역선전을 미리 예상하고, 미국측 대표 오스턴 씨와 짜고 한국 전선에서 노획한 소련제 소총 한 자루를 책상 밑에 미리 감추어 놓았다가 반격을 가하기로 한 것이다. 말릭은 우리의 이러한 계략도 모르고 “이번 싸움은 한국 사람끼리의 싸움이지 소련은 전혀 아랑곳이 없다”고 우겨댔다. “소련군은 이미 1947년에 완전히 북한에서 철수했고, 이번 동란에 소련서는 총 한 자루 보내 준 일이 없다”고 큰소리 치고 있었다.

 
말릭의 억지 연설이 끝나자, 오스턴 씨가 일어나 한국 전쟁은 소련이 배후에서 지시한 것이 분명하다고 반격한 다음, “여기에 그 물적 증거가 있으니 돌려보라”고 하면서 책상 밑에 감추어 두었던 소련제 소총을 꺼내 각구 대표들에게 돌려보였다. 한국 전선에서 생포한 북괴군으로부터 입수한 이 소총에는 1950년 소련제라는 철인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이 소총을 본 각국 대표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릭을 쳐다보자, 난처해진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 퇴장해 버렸다. 방청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소련 대표가 사회를 맡은 8월 중의 유엔 안보 이사회는 매일 설전(舌戰)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9월이 되었다. 9월은 영국이 안보 이사회 의장국이었다. 9월 1일, 글랜드윈 접 대표가 안보 이사회의 사회를 맡게 되자, 나는 지난달에 말릭으로부터 받은 모욕을 설욕하기 위해 착석과 발언권을 달라고 미리 요구했다. 의장은 “당사자 국인 대한 민국을 대표하는 장 대사에게 착석을 허한다”고 선언하자, 나는 마치 단거리 선수마냥 쏜살같이 달려가서 착석을 했다.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은 나는 “그동안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말을 못하고 참아 왔다”고 말문을 열어 소련을 공박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말릭이 “규칙 발언!”이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내 발언을 제지하려 들었다. 그는 나를 향하여 “도대체 저자가 누군데 무슨 자격으로 저 자리에 감히 앉아서 발언을 하는 것이냐?”고 노발대발하면서 “저자는 이승만 도당의 괴뢰”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말릭의 욕설에 대해 취소하라고 항변하면서 “대한 민국에는 이승만 도당이라는 것은 없고 나는 헌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대한 민국 정부를 대표해 이 자리에 의장의 초청으로 착석했노라”고 답변하고, 그동안 가슴에 쌓였던 울분의 발언을 약 40여 분에 걸쳐 여지없이 털어놓았다. 내 생애를 통해 가장 잊지 못할 후련한 연설이었다. 이날의 반박 연설은 텔레비전을 통해 전세계에 방송되어 참 통쾌한 연설이었다는 격찬도 많이 받았다.

 
한국 문제를 둘러싸고 유엔에서 불꽃 튀는 설전이 오가는 가운데도 미국과 자유 진영의 여러 국가는 한국 전선에 끊임없는 정신적 지지와 아울러 병력과 무기를 보내 주어 전투력을 강화했다. 불법 침략자를 집단적으로 응징해야 한다는 정의감은 전세계 자유 국가의 일치한 이념이었고, 동란을 계기로 세계 평화와 안전의 수호자로서 유엔이 훌륭하게 그 책임을 수행한 보람으로 마침내 9·28 수복의 날이 왔고, 적도(赤都) 평양도 10월 20일 탈환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뜻밖에도 중공군이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다시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들어갔으나, 그때는 본국 정부와 끊임없이 연락을 취하면서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6·25 직후와 같이 외롭고 초조하지는 않았다. 맥아더 원수의 주장대로 만주를 폭격하여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 무수한 우리 국군 장병과 우방 전우들의 고귀한 희생과 무고한 동포들의 처참한 수난의 대가로 겨우 통일 없는 휴전으로 끝나고 만 것은 참으로 천추의 한이다.

 
국운을 한몸에 짊어지고 정부의 원조도 별로 받지 못한 채 고군 분투하던 6·25 동란 중의 주미 대사 시절을 회고할 때마다 통일 없는 휴전으로 매듭 지어진 조국의 숙명이 슬프기만 하다. 그리고 나의 외교 활동과 ‘미국의 소리’ 방송 때문에 북괴의 지명 수배에 걸려 억울한 최후를 마친 누이동생 정온의 얼굴이 가끔 떠오른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이제 고인이 된 맥아더 원수와 덜레스 씨의 크나큰 은공이다. 이 두 분이야말로 대한 민국의 탄생에서부터 6·25 동란을 겪는 동안 꾸준히 우리를 도와 준 은인이다.

 
6·25를 겪은 후 내가 덜레스 씨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는 6·25 직전에 한국을 방문할 때 이미 한국을 돕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감겨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덜레스 씨는 한국 방문에 앞서 나의 초청 만찬에서 38선 시찰과 국회에서의 한국에 대한 지원 연설을 요청받고 넌지시 애치슨 국무 장관을 만나 자기가 한국 방문 중에 그런 발언을 해도 괜찮겠느냐고 미리 의논을 했다고 한다.

 
덜레스 씨 자신이 한국 국회에서 행할 연설문의 초안을 잡아 애치슨 장관에게 보여주면서 “유사시에는 혼자 싸우지 않을 것이다”라는 정도의 의례적 언질을 주어도 무방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하니 묵인해 주더라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애치슨 씨가 며칠 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만큼 그 정도의 묵인이나마 해준 것이지, 전쟁의 눈치라도 채었던들 응낙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덜레스 씨는 한국을 방문하는 즉시 38선을 시찰하고, 이어 국회에서 그와 같은 발언을 했던 것이다. 결국 이 언질 때문에 덜레스 씨는 “올가미를 쓰게 되었다”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자기는 스스로 발언에 책임을 느껴 더욱 한국 지원을 위해 앞장서서 최대 노력을 하였노라고 술회하였다. 그는 나에게 농담조로 “여보! 글쎄 그런법이 어디 있소…. 그날 저녁에 나는 멋도 모르고 그런 지독하게 비싼 저녁 한 끼 얻어먹고, 그 밥값을 치르느라고 어찌나 혼이 났는지 이루 말도 다 못하겠소!” 하며 껄껄 웃으면서 6·25 동란과 워싱턴을 오고 간 지난날을 회고하는 것이었다.

(196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