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8월 15일, 그날은 나 개인으로서나 내가 속해 있는 민주당으로서나 또 나를 선출해 준 국민으로서 감격적인 날이면서, 한편으로는 무한히 불쾌한 날이기도 하였다. 사실 그날은 민권의 승리를 확인하면서 관권의 승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율 배반적인 날이었다.
나는 그날 국민의 초라한 한 대표로서 정·부통령 취임 식전(式典)에 참석했던 것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그날은 결코 대통령의 취임만을 위한 날이 아니고 부통령의 취임도 동시에 행하는 정·부통령 취임의 날이었다.
그렇지만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고위층과 주한 외국 사절들의 좌석은 정중히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주인공의 한 사람인 새 부통령이 앉을 자리는 뚜렷한 위치에 놓여 있지 않았다.
이 사소한 듯한 고의적인 처사는 이승만 정권이 장차 민주당 출신 부통령을 어떻게 처우할 것인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예시한 도전적인 서두였던 것이다.
그날 나 장면에게 취임사를 할 기회를 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이미 명약관화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미리 기초해 두었던 다음과 같은 취임 성명서를 발표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성명서는 국민들이 모두 읽어 주었을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이에 요약해서 그 일단만을 되풀이하기로 하겠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의 선출로 불초 이 사람이 오늘 부통령의 중직에 취임하면서 스스로 책임이 중대함을 느끼는 동시에, 이번 선거에 있어서 국민 제위께서 갖은 고난을 무릎쓰면서 우리 민족의 민주주의 정신을 내외에 선양하여 주신 데 대하여 깊은 존경을 드리며 감사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 (중략) … 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과 더불어 민주 정치의 발전과 기본 민권의 수호를 위하여 분투할 것을 다시 한번 굳게 결심하는 바입니다.
… (중략) … 첫째로, 우리는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어야겠습니다. 권력의 남용은 국민의 마음속에 불안의 씨를 뿌리는 것이며,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는 국민의 모든 활동이 위축될 것입니다.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는 관은 자숙 자계하여야 하고, 민은 신념과 용기로 자기 권리를 보전하기에 최대의 노력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궁핍에서 해방되어야겠습니다. … (하략) ….”
이와 같은 취임사를 발표하였다.
정·부통령 취임 식전에서 취임사를 할 수 없었던 심정을 이제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정·부통령 취임 식전의 순서가 끝나자 그 식장에서 대통령 이승만 씨는 3부 요인들을 비롯해서 외국 사절들까지 일일이 식전에 모인 인사들에게 소개하는 수고까지 하였으나, 자신과 함께 취임하는 부통령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소개조차 안했다.
물론 부통령도 그날의 주인이기 때문에 새삼 소개할 필요가 없었을는지는 모르나 그것은 국가 원수로서의 당연한 상식적 예의가 아니었던가?
식전이 그런 방식으로 진전됨에 따라 내 머리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전직했던 이시영, 김성수, 함태영, 세 분 선배가 하시던 여러 말씀, 내가 국무 총리 재직 시에 겪은 일들, 특히 당시 국무 총리였던 나와 부통령이었던 김성수 선생, 그리고 문교부 장관이었던 백낙준 박사 셋이서 사학(私學)의 육성을 위한 문교 재단의 확립을 위해 건의했던 안건이 대통령의 일언지하의 각하로 수포화되던 일, 그리고 5·26 정치 파동 때에 민의를 조작하고 폭력배의 집단이었던 백골단, 딱벌떼를 동원하여 애국지사들을 대량 체포하는 한편 국회 의원들을 감금한 일, 5·15 정·부통령 선거 때의 조수처럼 밀린 이 정권 타도의 민원(民怨)의 아우성, 부정 개표, 대구 참관인들의 필사적인 투표함 사수, 해공 선생의 서거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지나간 날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내 머리 속을 스쳐갔다.
그러는 동안에 내 마음속에 뚜렷한 두 가지의 절망과 결심이 형성되었다.
하나는 민주주의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자 함에 있어, 이 정권이 이제 지난날의 포악의 몇 배나 되는 폭력을 자행해서라도 독재 정권의 공고화를 위해 무소불위의 행동을 할 것이라는 것.
또 하나는 그러면 그럴수록 민심은 더 반발적으로 나갈 것이며 국민은 결코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민권의 수호를 위해 항거의 대열을 더욱 견고하게 갖출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 국민의 염원을 달성하기 위해 야당은 목숨을 걸고 과감한 투쟁을 계속해야 할 것이라는 것.
이런 두 가지의 뚜렷한 생각이 다듬어지며 마침내 내가 수행해야 할 임무가 결론 지어졌던 것이다.
해공 선생의 서거로 정권의 교체는 불가능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국민이 정부의 제2인자라는 위치에서 국민의 권리 옹호를 위해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임에 틀림없으며, 또 가능한 한에 있어서 이 정권의 독재화의 길을 저지하는 국내외 여론의 근원지가 되어 달라고 다짐한 것이 분명하였다. 즉 야당을 이끌고 나가는 한 사람으로서 독재 정권의 행정부를 견제하는 모든 권한과 능력을 동원하여 정부 내에서의 투쟁을 감행하는 유일한 민주 근거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폭력 정권은 이 나의 결의를 그대로 내버려 둘 리는 만무하였다.
독재 군상(群像)이 사주한 흉폭한 테러의 마수는 드디어 나를 제거하려는 첫번째 만행을 감행하였다.
그것이 바로 1957년 9월 28일 시공관에서 벌어진 부통령 저격 사건이다. 내가 최고 위원의 한 사람으로 있던 민주당 전당 대회가 있는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이미 이런 흉모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나의 공적인 회합장의 참석을 조심성 있게 만류하는 동지들도 있었으나, 나를 당선시키느라고 신명을 걸면서까지 혈투한 천여 명 당원 동지들이 일당에 모여 전당 대회를 하는 마당에, 동지들의 노고를 위로하며 격려의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라도 모험을 하면서 출석하지 않을 수 없는 심경이었다. 또 국민의 선봉에 서서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싸움에 나서려는 각오뿐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그 대회에 나갔던 것이다.
역시 입수된 여러 가지 정보 그대로, 그리고 벌써부터 예측했던 그대로 독재 정권의 테러단은 암살 계획을 실천에 옮겨, 드디어 시공관 복도에서 저격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손에 부상을 입었을 뿐, 생명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정도로 제1차 저격을 당했던 것이다.
이는 오로지 천우 신조와 당원 동지들의 민첩한 보호에 의한 것이며 나아가서는 전국민의 전폭적인 지원의 은택이라고 생각한다.
범인은 곧 체포되고 연루자도 구속되어 그들의 사형 선고로써 범행 직접 관계자들의 처벌은 일단락 지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는 정치 테러였고 배후 조정자가 엄연히 있다는 것은 과거의 예나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명백한 일이지만, 모든 것이 정치적 흑막에 가리운 채 아직까지도 노정(露呈)되지 않고 있다.
나는 생각했다. 저격범과 직접 관련자는 다만 무지하다는 죄가 있을 뿐, 오히려 가엾은 사람들이었다고…. 가증스러운 것은 그렇게 하면서까지 독재 정권을 키우려는 그자들이라고…. 그리하여 나는 한 인간으로서 그 불쌍한 죄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선량한 시민으로 되돌아갈 길을 터주기 위해 그들 범인들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대통령에게 청했던 것이다.
'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부통령직 4년 - 4. 더해가는 부패와 보안법 (0) | 2009.09.30 |
---|---|
나의 부통령직 4년 - 3. 공관에서의 민주 투쟁 (0) | 2009.09.29 |
나의 부통령직 4년 - 1. 4·19와 민주보루의 등대수 (0) | 2009.09.27 |
6·25 동란과 워싱턴 - 4. 전세계에 방송된 울분의 연설 (0) | 2009.09.24 |
6·25 동란과 워싱턴 - 3. 미군 파병이 결정되기까지 (0) | 2009.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