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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 및 저서 - 신앙백서

신앙백서 - 구약 성경의 역사적 가치 (1933. 07.)


     서언


 
초자연 종교에 있어서는 전지 전능한 신과 사람 사이의 교섭, 즉 천계(天啓)가 필연적으로 예상된다. 이 천계가 사람의 신에 대한 신앙의 근본을 형성하고 따라서 진정한 종교관의 기준이 되어 객관적 기재 사실(記載事實)로 전래된다고 하면, 이는 곧 오인(吾人)의 인생관과 내적 외적 생활 태도에 중대한 결정을 주는 원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어서는 이 천계를 기록한 경전을 ‘성경’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성경 가운데 천계가 얼마나 충실히 기재되어 있으며, 기타 일반 내용이 과연 얼마나 신뢰할 만한가는 무엇을 척도로 하여 비교 규명해 볼 수 있을까? 성경을 순진한 천계의 기록으로 인정하고 아니함은 곧 신앙과 비신앙의 분기점이 되는 만치 문제의 성질이 극히 중대하다. 즉 성경 기사의 내용이 다만 이스라엘 일족의 종교 심리를 일시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추상적으로 안출(案出)된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냐, 또는 세계 전인류를 대상으로 영원한 진리를 신감적(神感的)으로 제시하는 구체적·역사적 사실이냐 하는 문제다.


 특히 구약 성경에 있어서 이 문제의 중대성이 일층 강화된다. 창세기의 기사가 사실이라면, 이는 곧 우주와 인간의 기원 문제에 근본적인 단정을 주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이에 의거하여 결정될 것이다. 성경에 내포된 모든 사상(事象)이 진정하다는 것은 혹 신앙으로 혹 순교자의 혈증으로 혹 과학적 연구로 십분 확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앙적 경전’이라는 문제를 잠시 떠나 제2 의적(意的)으로 단순히 한 개의 역사적 문헌으로 보아 과연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검토하려 한다.


     
역사로서의 성경


 
우리는 성경을 한 개의 문화적 가치로 보아 그 객관적 가치를 아래의 세 가지의 증명에서 구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저자와 저술 시대가 확실하다는 증명.

 둘째, 원본에 가필 수정이 절대로 없었다는 증명.


 셋째, 저자의 인격과 저술 당시의 환경이 일체의 오류와 허위의 가능성을 불허하였다는 증명이다.

 성경의 역사적 가치가 가장 풍부한 구약의 초오경(初五經), 창세기·출애급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에 국한하여 연구하려 한다.

1. 초오경은 히브리 민족의 입법자요, 통수자이던 모세(Mosses)의 저술인 것이 확실하다.

 
1) 외적 증명

 
(1) 초오경을 모세가 저술하였다는 것은 자고로 전 유다 민족이 전통적으로 확신하여 호말(毫末)의 의심을 가진 자가 없었다. 또 모세로부터 그리스도 시대까지의 유다인 성서 기자와 당시 역사가인 필로(Philo, A.D. 100), 플라비우스 요셉(Flavius Josephus, A.D. 96)과 탈무드 유다 성전집의 편찬자와 기타 유다 학자들이 다 같이 모세의 저술인 것을 기록으로 증명했다.

 그뿐 아니라, 전세계에 유리 산재하여 역사상 유(類)를 보지 못할 만치 기이한 존재를 계속하고 있는 현대 유다인들도 초오경은 의심 없이 모세의 신감적 저서인 것을 일방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2) 유다인과 수화(水火) 상극이던 사마리아 사람들도 초오경을 모세의 저서로 인정하고 소중히 보전했으며, 또 메시아가 강생하시기를 고대하였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 강생 전 약 1천년에 십지족으로 분리할 때부터 저들이 구약 성경 내용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 없이 확신해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3) 유다 민족 이외에 상고(上古)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 각국의 역사가들도 초오경이 모세의 저술이요, 그의 법률이 포함된 사실을 기록했다. 셀수스(Celsus, A.D. 300), 포르피리우스(Porphyrius, A.D. 304), 줄리안(Sulian the Apostate, A.D. 363) 등은 모세를 초오경의 저자로 인정하는 것이 어디로 보나 자기 입장에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이 너무나 묘연하여 이를 부인치 못하고 솔직하게 시인하였다.


 (4) 그리스도와 신약 성서와 저자와 종교 이래의 여러 성전(聖傳)이 또한 모두 이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스도께서 모세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 복음 성경에만 16구절에 달한다. 그 두 구절(요한 3, 14; 6, 32)에는 출애급기의 중요한 사적(事蹟)과 예언이 언급되었다.


 즉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루가 24, 27).


 또 당신이 누군가는 모세의 경서가 증명하는 것을 말씀하셨으니, 즉 “만일 너희가 모세를 믿는다면 나를 믿을 것이다. 모세가 기록한 것은 바로 나에게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5, 46)라고 하셨다. 정도(定徒)들과 여러 제자들도 그 저서 중 여러 곳에서 이 사실을 증언했고(루가 16, 31; 사도 3, 2; 15, 21; 26, 2; 28, 23; 로마 5, 5-19), 기타 여러 교부와 교회 박사와 성서학자들도 이 점에 대하여는 똑같이 일치하여 감히 이설(異說)을 창안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64)에서는 교회 전래의 소신에 의하여 모세를 초오경의 확실한 저자로 지명했고, 바티칸 공의회(1869-1870)와 로마 성경 심사 위원회에서 또한 이를 확인하였다.

이상 여러 외적 증거로 초오경의 역사적 진가는 불충분하나마 증명되었을 것이다. 외적 증거에 있어서 이미 이러하거니와 이제 성경을 내부적으로 검토하여 그 객관적 증명을 구하여 보자.

 
2) 내적 증명

 (1) 초오경의 내용을 구성한 모든 기사를 종교적, 역사적, 지리적, 정치적인 면으로 보아 또는 도덕, 풍속의 여러 점으로 관찰하여 그 기원이 얼마나 구원(久遠)한가를 추지(推知)할 수 있으며, 그 고전적 특징을 모세 당시의 모든 그것과 일치 부합하는 것을 우리는 직관한다.

한 예를 들면, 유다 민족의 이집트 체류와 그 희망의 복지(福地)로 귀환하던 장면의 기사 내용이 당시 람세스(Ramesses) 조(朝)의 일반 정세와 완전히 부합되어, 솔로몬 시대와 예언자와의 그것과는 전면적으로 상이한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근대에 이르러 프랑스 학자 신포리옹이 1821년에 이집트 상형 문자 해독법을 발견하고, 그로데펜트가 1802년에 앗시리아 계형 문자(楔刑文字) 독법(讀法)을 발견한 이래 이집트와 앗시리아의 고대 문명의 지식이 급속도로 전개되어 성경 기사와 비교 대조한 결과 비로소 그 내용이 극히 미세한 점에까지 동시대의 다른 역사와 부합되는 사실을 명백히 이해하게 되었다.

 계형 문자를 보장한 바빌론 시대 도서관에서 창세기의 일부인 노아 홍수에 관한 기록이 발견되어 성경 기사와 일치하는 확증을 얻게 되었다.


 또 최근에 와서 고고학자들이 지하 발굴 연구를 대규모로 행함으로써 팔레스티나에 산재한 예루살렘, 예리고, 헤브론 등 시가 지형의 일부를 알게 되고, 이집트 투탄가멘 왕묘의 발굴 등으로 동시대의 종교, 풍속, 습관, 분묘, 제신상(諸神像)의 형태 등이 성경 기사와 전적으로 부합되는 물적 증거를 얻게 되었다. 이런 세밀한 점에 있어서까지 호말의 착오도 없는 성경 기사를 서술한 저자는 반드시 그 당시의 제반 사물을 몸소 경험한 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초오경 기사에 표현되는 순박한 고전적 필치는 절대로 타자의 모방을 불허하는 태곳적 기원을 가리킨다.

 
(2) 구약 성경에는 유다 민족의 법률적, 정치적, 군사적인 여러 면에 걸쳐 저들 생활의 전모가 한 권의 책에 총괄되어 있으며, 저들의 일체의 생활 방식이 이에 의거하여 형성된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면에 긴밀한 결연 관계를 가진 민족적 기록의 내용에 모순과 허위가 충만하여 있으리라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2. 초오경에 수정 가필이 전혀 없었다

 
초오경을 모세 자신이 기록하였다는 것은 이미 상술한 바와 같거니와, 그 원문이 하등 수정을 받지 아니하고 과연 오늘까지 그 순전성을 보전해 왔는가? 이것은 자고로 여러 학자들이 확신하여 왔으나, 특히 최근에 이르러 케니코(Kennicot)와 드 로시(J. B. de Rossi)가 천백 종의 히브리 구약 성경 원본과 사본에 대하여 극히 세밀한 대조 연구를 해본 결과, 오늘날 우리가 가진 구약 성경 역문이 그 원본과 하등의 실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1) 구약 성경의 실질적 수정이나 개찬(改竄)은 불가능하였다. 성경 기사는 유다인 생활의 전면적 축도이었던 만큼, 누가 만일에 그 내용에 본질적 수정을 가한다 하면 저들의 신앙과 관습과 법률과 풍속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요, 또 재래의 모든 전통적 신앙이나 관습에 배치되는 어떠한 참월적(僭越的) 개찬을 감히 하는 자가 있었다고 하면 일반 대중이 절대로 이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2) 당시 역사가 요셉에 의하면, 유다인들은 초오경을 거의 완전히 암송하다시피 하여 각 권의 자수까지 헤고 있었은즉, “아무도 성경에서 한 자의 삭감을 감히 할 수 없었다. 저들은 성경을 신감적 천계서(天啓書)로 확신하였고 이를 옹호하기에 신명을 불사했다.”


 (3) 이스라엘의 십족(十族)이 분산된 후(강생 전 962년), 사마리아인과 유다인 간에 감정적 충돌이 맹렬하였고 증오가 극심하였음에 감하여 어느 일방에서든지 양족간에 공통된 전래적 성서의 일자 일구(一字一句)라도 삭감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3. 초오경의 진실성

 
모세가 자신이 오류에 빠졌거나 또는 타인을 기만할 의사가 없었다고 하면, 저의 모든 기사는 진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1) 모세는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1) 초오경 중의 후사경에 기록된 사실은 모세가 친히 보고 경험한 가견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이었을 뿐 아니라, 그 주요한 사건의 대부분은 모세 자신이 지휘자가 되어 성취된 것인즉, 모세로서 그 사실에 대한 지식의 오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2) 모세 자신이 경험한 이외의 제반 사상(事象), 즉 창세에 관한 전망 등등은 선조 전래로 확신한 구전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다. 이 전설은 모세 한 사람뿐 아니라 당시 유다인이 전반적으로 주지하였으며, 가요(哥窯)와 명각(銘刻)과 건조물들에 십분 표현되어 영구히 저들 기억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또 저들이 이와 같이 장구한 기간에 아무 착오 없이 전설을 보존하여 온 중대한 요소의 하나는 홍수 시대 이전 성조(聖祖)들의 비상한 장수가 곧 그것이다(특히 아담으로부터 ‘노아’의 부친 ‘라멕’까지 1056년 간).


 이 장수의 원인은 혹 육체의 강장과 의기의 고매함과 음식물, 특히 과일의 우량한 품질 등에 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유래한 설은 하느님께서 종교적 예배와 장차 오실 구세주에 대한 신앙과 인류의 초자연적 종향(終向)에 관한 계시와 성전을 후인에게 영구히 보존케 하기 위하여 특별하신 섭리로 안배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라틴 역(譯) 성경에 의하면 ‘아담’이 ‘셋’과 8백년 간을 같이 살았고, ‘에노스’와는 695년 간, ‘가이난’과는 650년 간, ‘에녹’과는 308년 간, ‘바두살나’와는 243년 간, ‘노아’의 부친 ‘라멕’과는 56년 간을 같이 살았다 했으니, 아담 이래 여러 성조가 천계의 중요한 진리를 그 후손들에게 오류 없이 전수하기가 얼마나 용이했는가는 추측할 수 있다.


 성서의 역사적 권위를 부인하려는 유리론자(唯理論者)들 중 호루스(Horus)의 저자는 모세가 말한 1년은 태양력의 1년이 아니라 태양력의 1개월을 가리킨 것이라 했다.


 그러나 만일 저의 산법(算法)으로 나간다 하면, 노아의 부친 라멕은 노아를 5세에 낳았을 것이다. 이 성조들의 장수에 대하여는 유다인 역사가 중 가장 권위자인 플라비우스 요셉의 증언 한 구절로 종결하려 한다.


 그들은 “고대 성조들의 수명을 우리 현대인의 짧은 일생에 비할 것이 아니다. 나는 고대 성조들의 수명이 대단히 장구하였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는 그리스와 이집트의 갈데아 등 각국의 고대 역사가들의 증거 기록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였다.

 
2) 모세가 민중을 기만할 의사가 없었다

 모든 역사와 전설에 표현된 모세는 고결한 덕행과 순진한 신앙과 공정한 품격의 소유자다. 저의 진실함은 유다 인민의 절대 신임을 얻었고, 저의 소저(所著)는 전 유다 민족의 생활을 지배하는 기준이 되기까지 하였다. 또 저서의 기사 자체가 모세의 진실한 성격을 증명해 준다. 그 서술의 필치는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평화의 분위기로 충일되어 있으며, 순박하고 공정하여 평정과 과장과 아유(阿諛)와 교격(矯激)의 문구를 하나도 볼 수 없다. 자기 친척과 선조의 과실을 은닉하려 하지 않고 자기와 부하들의 약점과 벌받은 사실을 솔직하게 그대로 기술한 것으로 보아 저가 대중을 기만할 의사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3) 모세가 기만할 수가 없었다

 모세가 초오경에 기술한 사실은 그 대부분이 공연히 발생한 중대 사적(事蹟)이었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유다 민족의 정치적·종교적 법률이 구성된 것이다.


 모세가 이 제반 사적을 기술할 때에 다만 일반적으로 막연히 하지 않고, 모든 인명과 지명을 명시하여 민중이 목도한 그대로 한 것이다.


 “너희는 야훼께서 하신 이 모든 엄청난 일을 눈으로 보았다”(신명 11, 7) 하였다. 만일 이 기록이 허위라면 일반 민중이 절대로 이를 용인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대하여 한 사람도 감히 부인하는 자가 없었고, 모세가 주님의 성명(聖名)으로 저들에게 부과한 모든 고행적 계명을 묵묵히 감수했을 따름이다. 유다인이 준수하는 오순절과 기타 여러 종교적 의식에 영송하는 성가 중에도 저들이 이집트에서 기반을 탈출한 전말과 ‘시나이’ 산록에서 십계명을 받아 와 광야에서 40년 간을 체재함과, 모세가 여러 기적을 행한 각반 사적(各般史蹟)이 내포되어 있어 아무도 능히 이 전통적 신념을 동요시킬 수가 없었다.


 모세 이전의 제반 사상(事象)도 저들의 뇌리에 기억이 생생하였다니 선조 유적의 기록을 유다인보다도 더 충실히 보전하고 전수한 민족은 없었다. 모세가 이 귀중한 민족적 성전(聖傳)을 자의로 개찬할 수도 없었으려니와, 설혹 한다 할지라도 일반 대중이 적극적으로 이에 반항하였을 것이다.


    
결론

 
이상으로 구약 성경의 중요 부분인 초오경이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세 조건을 어느 역사적 기록보다도 더 완비한 것임을 불충분하나마 약술하였다. 일보 나아가 이 초오경을 자연 과학 방면으로, 즉 지질학·천문학·생물학·고생물학·고고학·인종학 등 제 방면으로 여러 전문 대가들이 가장 준열(峻烈)한 검토를 가하여 왔으나, 우금(于今) 성경에 내포된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자연 과학과 모순되는 한 점도 발견치 못하였다는 것을 특히 부언하고 싶다.

 도리어 성경에 대한 과학적 검토가 날로 신열(辛烈)해짐에 따라 측면적으로 자연 과학의 연구열을 자극하여 의외로 위대한 수확을 얻게 되었다. 즉 성경의 철저한 과학적 탐구는 다만 그 기사 내용이 자연 과학과 기묘하게도 합치되는 사실을 가속도적으로 증명하여 주었을 따름이며, 그 권위를 더욱 높여 주었을 뿐이다. 교회에서도 근대 평론가들의 몰이해한 공격에 감하여 종래의 소극적 호교 태도를 벗어나, 각 교황의 원조와 격려하에 적극적으로 성경에 대한 독립 독보적 연구를 시작하여, 여러 곳에 성서 연구소를 설치하고, 20여 부문에 걸쳐 각 전문 대가들이 10여 종의 언어로 연구와 교수를 거듭하고 있다. 특히 예루살렘의 성 도미니코회가 경영하는 성경 학교와 로마의 교황 직할인 성경 연구소는 그 규모의 방대함과 성도의 고상함이 세계에 관절(冠絶)할 것이다.


 이로써 성경을 일종 미신적 신화시하는 유리론자들과 사이비 과학자들의 공격에 대하여 그 유치한 논거를 일거에 분쇄시킬 진용이 완비되어 있다.


 성경이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절대적인 객관적 가치를 가진 한편, 그 본질적인 종교 도덕 방면에 있어서 인류 사회를 정신적으로 지도하고 비익(裨益)케 한 위대한 가치는 절대로 탁월하여 단연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끝으로 교회 역사의 대가 다라(Abble Dara) 씨의 ‘교회사’의 일절을 빌려 결론을 맺고자 한다.

 “유리주의자(唯理主義者)들아, 기적을 안 믿는가? 군들은 아시아 일우(一隅)에서 몇몇 유다인이 기록한 일개 책자(聖經)를 절멸시켜 보려고 천 년 간을 두고 무한한 헛애를 썼다. 군들이 준열한 혹평으로 만 권의 서책에 치욕적인 치명상을 주었을지언정 성경의 엄연한 권위는 감히 침범치 못하였다. 이 기묘한 사실이야말로 참으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1933.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