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는 더해 가고
그러는 동안에 이 정권의 부패는 더욱 조장되고 불안은 더욱더 높아갔다.
악질 집권자는 조국의 경제 부흥을 돕기 위한 외국 원조의 막대한 액수를 합법을 가장하면서 특권층에 횡류했고, 사욕과 정권 유지를 위해 거침없이 소비했다.
공무원은 극도로 썩어 매관 매직에 공정 가격까지 호가하게 되고, 경제 정책의 졸렬은 마침내 국민을 빈곤으로 몰아넣었으니 농촌은 더욱 황폐해져 농촌 경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궁핍해지고, 국가의 간성인 군인들은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고, 중소 기업자와 소시민의 실직자가 늘고, 노동자들도 응당의 임금을 받지 못해 생활고에 허덕이는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4대 민의원 선거 때의 용서할 수 없는 부정과 횡포의 도가 막심함을 보고,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민권 수호를 위한 반대 투쟁을 여론화시켜 전국민이 궐기하도록 하는 데 정치적인 모든 힘을 기울이려고 노력하였다.
우선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성명을 내었다. 그러자 자유당 국회는 즉각적으로 나에 대한 경고안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민주 공화 체제를 국시로 하는 나라에서 정부의 한 요인이 국가 시책이 그릇되어 감을 보고, 그를 시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국민의 의사를 대변한다고 나선 선량들은 그렇게도 못마땅하였던 것인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러나 독재와 독재 정권의 아부배들에게 있어서 그런 몰염치는 항다반사(恒茶飯事)이고, 보다 극악한 흉계를 꾸미면서 민권을 짓밟는 데만 그들은 전심하였던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볼 때, 그래도 조금이라도 분별 있는 독재자들은 법을 강제로 제정하기까지 하면서도 어느 정도 합법적인 독재 정치를 감행하였는데, 이 독재 정권은 비법·불법·무법적인 수단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보안법 반대 투쟁
그리고 마침내 극악한 탄압을 합법화하려는 흉모가 시작됐다.
그들은 우리의 부흥을 원조해 주는 우방들의 충고나 국제적인 여론 같은 것을 조금도 돌아다보지 않고, 이른바 가죽 잠바 부대로 알려진 정복 깡패를 동원하여 정치 테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5·26 정치 파동 때의 ‘땃벌떼’, ‘백골단(白骨團)’ 등속의 부류가 재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및 무소속 의원들이 즐거운 크리스마스 시즌을 비참한 국회 농성으로 맞이했고, 추운 겨울밤에 민주주의를 지키는 사투 속에 지낸 그날 밤을 우리 국민은 한 사람도 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폭력은 발동되어 보안법이 강제 날치기로 통과되고, 마침내 2·4 파동이라고 일컫는 최후의 항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때 이미 내가 그런 독재 정권의 한 요직에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 자신으로서 도저히 이 이상 독재 정권과 타협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당의 주요 간부들과 보안법의 무효를 위해 극한 투쟁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 일부 간부들은 다음 몇 가지 이유로 민주당 의원들의 국회 의원직 사퇴에 대해서는 자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이때에 민의원 의원들이 사퇴하면 정치적 혼란이 더해질 뿐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 이 독재 정권이 국민 운동 같은 것을 결코 방임치 않을 것이 분명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보아 야당 민의원이 사퇴하면 그들은 오히려 거리낌없이 일인 독재, 일당 독재 정권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을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몇 날 몇 밤을 심히 고민하였다. 나 개인으로서도 악의 무리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정부에 이름을 걸고 있다는 것이 심히 괴로웠던 것이다.
한 자연인으로서의 장면은,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물러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할 때, 나는 나 개인이면서 민주당의 당원이고 나를 선출해 준 국민의 부통령이라는 것을 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당의 민의원들도 국민의 대변자로 나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나나 민주당 의원들은 현실적으로 국민의 자유를 위해 온갖 탄압과 일부의 오해를 무릅쓰고 현실적인 정치 투쟁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당론을 통일 결속시켜 민주 투쟁의 대열을 견고히 하고서, 보안법 통과의 비법성을 규탄하는 국민 운동에 앞장서기 위해서 보안법 반대 데모를 강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이 보안법으로서의 언론 탄압과 아울러 이승만 정권은 독재적 중앙 집권을 획책하여 지방 자치법도 개악하였던 것인데, 이것은 다가올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과 살인의 술책을 다하여 재집권하는 날에 완전 독재 정권을 수립코자 지향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또한 지금은 그 흑막이 속속들이 드러난 바 있거니와 야당을 지지하는 신문이라고 하여서, 지난해 4월 3일 경향 신문을 폐간시키는 따위의 완전히 정치적 횡포로서의 언론 탄압을 불법적으로 감행했던 것이다.
주요한(朱燿翰) 의원의 집필로 된 글을 트집 삼았지만, 실은 경향 신문이 국민의 정당한 언론을 반영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데 비위를 상하고 있는데다가, 나와 약간의 관련이 있고 야당을 두둔한다는 데 대한 증오감으로서의 정치적 탄압임을 국민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폐간시킬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알고 있는 양심적 법관들은 미 군경 법령 88호에 의한 공보실장의 행정 조치가 불법임을 지적하고 속간의 판결을 내렸던 것이 아닌가?
이것은 민주주의의 등대인 여론의 대변 기관을 말살함으로써 정치적 암흑 사회를 만들려는 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최초의 탄압이었고 독재자의 상투 수단임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경향 신문을 폐간시킬 것을 조건으로 공보실장에 취임한 전성천(全聖天) 씨는 갖은 탄압과 계책을 농하면서 다시 정간시키는 조치를 했고, 이에 따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즉 이번 정·부통령 선거 때까지만이라도 경향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게 하면 그것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의 양쪽 수레바퀴
그런데 보안법 반대 투쟁의 방법론에 있어서 또 전당 대회를 앞두고서 당내 의견 대립이 생기기 시작하여 일부 국민에게 실망을 준 듯한 느낌이 들자, 나는 몹시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소위 신·구파라고 하는 대립 감정이 민주당 내 균열을 가져오지나 않을까 하는 기우가 국민의 감정 속에 배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존경하는 동지 고(故) 유석과 함께 우리의 차의 양쪽 수레바퀴가 될 것을 맹약했고, 또 잡음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다짐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당을 깰 수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으며, 고(故) 유석도 역시 이를 위해서 같이 노력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내 동지들의 의견의 차이는 마침내 전당 대회를 앞두고 우리 민주당 당원 전체가 반성해야 할 지나친 대립을 노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편 자유당은 여러 가지 수단으로 민주당을 분열시키려고 책동하였는데, 경상남도 당 대회 때에 그 절정에 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 민권의 수호를 위한 정치 이념으로 결속되어 있었고, 당의 운영도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식에 철저했기 때문에, 과장 선전되었던 분열의 위기도 무난히 극복되고 민주당으로서 일단의 전진을 하였던 것이다.
사실 민주당은 어떤 개인의 당이 아니고 국민의 당이며, 국민의 주권과 국민 생활의 안정을 쟁취하기 위해 국민의 앞장에 서서 독재와 부패에 대항하여 싸우는 당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감정의 대립이나 의견의 차이 정도로 분열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당 대회 겸 정·부통령 후보 지명 전국 대회를 치르고 난 뒤, 우리 두 사람, 즉 유석과 나는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심정으로 당의 결정에 복종하여, 당원의 감정 수습과 당론의 통일에 힘써 차기 선거의 필승을 기해 더욱 굳게 결속하였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 당의 대통령 입후보자 조병옥 박사가 도미하여 수술하게 되었다. 조 박사가 떠나는 날, 나와 모든 당원은 그분이 조속히 쾌유하여 돌아와서 선거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원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 독재 정권과 자유당은 우리 민주당에게 선거 운동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 이례적으로 선거를 3월 15일로 당겨서 실시키로 했기 때문에 조 박사의 도미는 대단히 초조한 감을 자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조 박사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동지들은 무한히 기뻐하며 그의 조속한 귀국을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벽력으로 조 박사의 서거가 전해지고, 전국민의 비탄과 절망에 휘감긴 거리를 무언으로 그는 귀국했던 것인가. 4년 전 해공 선생이 투표일을 10일 앞두고 서거한 것을 상기할 때, 이 민족은 이렇게도 구원받을 수 없는가 하고, 땅을 치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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