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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Ⅲ.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세칭 청와대 4자 회담

 민주당의 분당으로 국민의 신망을 잃어간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자책을 면할 길이 없었다. 계속되는 사회적 혼란과 정국의 긴장 상태를 미력으로나마 시정해 보고자 발버둥치고 있었을 무렵, 곽상훈 민의원 의장의 제의가 있어 내가 몇 차례 대통령을 방문한 적이 있다.

 
때는 1961년 3월 23일이다. 말썽 많은 정계에도 새로운 도약대가 마련되기를 바란 것은 청와대 윤보선 대통령이나, 민‧참의원 양의장이나, 국무 총리나 다 똑같았을 것이다. 내가 청와대에 도착해 보니, 윤 대통령을 비롯하여 곽 의장과 참의원 의장 백락준 씨 외에도 민주당 구파측의 중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날 논제도 내가 연락받고 온 것은 반공을 위한 국민 운동을 전개해 보자는 것이었다.

 처음엔 화기 애애한 가운데 그런 얘기가 교환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사이에 화제가 전환되어 가고 있었다. 대통령과 민‧참 양의장 외에 김도연(金度演) 신민당 위원장, 양일동(梁一東), 유진산(柳珍山), 조한백(趙漢栢), 서범석(徐範錫) 제씨와 각원으로서 현석호(玄錫虎) 씨 등이 모인 자리였다. 곽 의장의 말대로 국민복 제정에 관한 얘기나, 반공 의식의 희박에 따른 사회 혼란의 극복책으로 국민 운동을 거족적으로 전개하자는 의견 교환에 그칠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화제가 차츰 정권 문제로 바뀌어져 나중에는 윤 대통령으로부터 “혼란한 정국을 유지할 자신이 있느냐?”라는 질문까지 받게 되었다. 이를테면 불러다가 따지자는 심산이었다.

 “지금은 자신쯤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어떻게 합니까? 나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여러분이 모두 책임 있는 사람들이니 함께 협력해서 잘되도록 힘써야 되지 않겠소?”

 
이러한 나의 대답에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곧 이 모임의 의도가 표면화되었다.

 
“약화된 경찰을 믿을 수도 없고, 군부 태도도 믿을 수 없는 불안한 정국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느냐?”라는 윤 대통령의 어조는 은근히 나의 국무 총리 사임을 종용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곽 의장은 “나더러 국무 총리 하라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거 참 별소리가 다 많지…”라는 여담도 나오는 판이었다.

 이들 모임에 나를 부른 의도를 깨닫게 된 나는 “이렇게 되면 처음과는 얘기가 달라지지 않소? 국민 운동을 논의하던 화제가 다른 데로 돌아가 나더러 정권을 내놓으라는 얘기가 된 것 같은데”라고 내 태도를 밝혀 합당한 이유 없이 무책임하고 경솔하게 국무 총리직을 사임할 수 없음을 명백히 했다.

 
“나의 국무 총리직은 법 절차에 의해서 맡게 된 것이므로 내 자의로 정권을 내놓는다 안 내놓는다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당신의 강요에 따라 총리직을 사임할 성질의 것도 아닌 줄 안다”는 뜻을 전하며 법 절차에 의해 총리직에 취임한 것이므로 법 절차에 의하지 않고서는 총리직을 사임할 수 없다고 대답하고는 자리를 물러 나오게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양측의 대변인을 통하여 기자들에게는 그날에 있은 일을 일체 비밀에 부치고 국민 운동에 관한 토의를 하였다는 발표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밖에서의 잡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서는 양쪽에서 합의를 보았으나, 마침 청와대에는 기자들이 와 있지도 않았지만 하루가 지나서 백 의장이 합의된 약속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신문지상에 발표해 버렸다.

 분격한 나는 이 사실을 반도 호텔에서 개최되었던 민주당 원내 총회에서 상세한 사실 그대로 발표하게 되었다. 이래서 이석기(李錫基) 민주당 원내 총무가 청와대 회담은 윤 대통령의 편파적인 정치 관여라고 통박하고, 이어서 “야당 대표들만 불러 놓고 장 총리에게 정권을 내놓으라고 말한 사실은 언어 도단이다. 청와대는 음모처다. 윤 대통령이 앞으로도 그런 식의 정치 간섭을 한다면 우리 민주당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격한 발언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받아 양일동 씨가 격한 어조로 신문에 비난 담화로 응수했다. 이것을 전후하여 청와대 4자 회담이라는 것이 항간에 설왕 설래하였다.

 막상 4자라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맨 처음 윤 대통령, 곽 의장, 총리, 셋이 합의한 후, 3월 23일에 전술한 사건이 있기 전에 청와대 뜰에서 셋이 담소하고 있노라니까 뜻밖에도 유진산 씨가 나타나 합석하게 된 일이 있었다. 유씨는 신‧구파가 협조하는 유일한 길은 구파 인사들을 입각시키는 것밖에 없다고 사견을 피력했다. 이것이 소위 청와대 4자 회담이라는 명칭으로 세상에 전해진 것이고 국민의 시선을 모으게 된 결과를 초래했다.

 
소위 청와대 4자 회담 이후에는 새로 입각한 구파계의 각료들과 큰 의견의 대립 없이 내각에 변동이 없다가, 5월 3일에 3차로 내각을 개편하게 되었다. 구파측 각료로 교통부 장관이었던 박모(朴某)와 협조가 잘되지 않아 사임을 권고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구파측 4부 장관을 소환하라’는 주장이 대두되니 그나마 협력의 길이 아주 막혔다. 그때 4부 장관의 사임을 수락하고 내각을 바꾼 것이 1961년 5월 3일, 3차 내각의 개편이었다.

 
이틀 지나 5월 5일에는 서울의 대학생 일부가 남북 학생 회담을 제창하게 되어 이것 역시 사회를 혼란시키는 인상을 주고 있었으나, 이에 대한 경찰의 대비책은 세 단계로 나누어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이들의 모임은 순전히 일부 불순 학생들의 선동에 의한 것이고 크게 염려할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들과의 접촉을 정기적으로 가진 나였지만, 이는 4‧19 학생의 주체 세력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지만 학생들의 탈선을 용납하자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