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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Ⅱ. 부통령 시절 - 잇따른 부통령 후보의 액운

 끊임없는 감시 속에서 실권 없는 부통령직에 앉아 있기가 바늘 방석이었다. 이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59년 10월 26일, 민주당으로서는 입후보자 지명 대회를 열게 되었다.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 박사와 함께 러닝 메이트로 선출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잡음이 당내에서 떠돌았다. 소위 신‧구파의 세력 다툼이 조금씩 고개를 들게 된 슬픈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민주당 내의 신‧구파 문제는 창당 시에 이미 그 씨가 배태(胚胎)되었던 것이다.

 
민주당이 결성될 무렵에 한국 민주당의 후신인 민주 국민당은 국회에서 15석밖에 차지하지 못하여, 당시 그대로는 도저히 야당의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이 민주 국민당이 발전하여, 대(大)야당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신진들과 합세하여 신당을 결성해야 할 운명이었다.

 
또한 민주 국민당 이외의 분산되었던 야당 의원들도 자유당에 맞서기 위한 새로운 정당의 결속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때였기 때문에 자연 민주 국민당과의 단합이 쉽게 되었다.

 
모두가 대여 투쟁에 합심한다는 대의(大義) 밑에 결속한다면 별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양자의 주장은 충분한 융합을 보지 못했고, 상호 주장의 일치점을 찾지 못한 채 양세력이 민주당이라는 신당에 우선 집결되었던 것이다.

 
한민당 계열의 민주 국민당에서는 자기들이 새로 창설되는 민주당의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민당은 해방 직후부터 결성되어 거의 10여 년 간 성장해 온 것이고, 정치적 경륜이 뛰어난 데가 있다고 자처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한민당 계열의 주장은 골수에 박혀 요지부동이었다. 한편 새로운 세력으로 민주당에 가담하게 된 소위 신파측에서는 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신파측에게는 지방적인 지주 세력에 기반을 둔 한민당 계열의 주장과 노선이 일치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좀더 개방적이고 혁신적인 기운을 원했던 것이다. 한민당 계열의 보수 세력은 국민의 신망을 차츰 잃어가고 있었다. 국회 의석이 줄어들지 않았던가? 좀더 근대화한 정계 풍조(政界風潮)를 조성하여 신진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력이 민주당의 일선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독재에 투쟁한다는 대의 밑에 이 양세력이 단합은 되었으나, 쌍방간의 어긋난 견해는 끝내 일치를 보지 못했다. 이것이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민주당 내에 자라게 된 것이다.

 
세간에서는 나를 신파에서도 흥사단(興士團) 계열이라고 보는 이가 있었다. 이는 전혀 낭설이다.

 
나는 흥사단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흥사단에 가입한 일도 없고 흥사단과 연관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흥사단 계열에서 나를 지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내가 흥사단 계열이라는 지목을 받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이 신‧구의 대립이 제4대 정‧부통령 입후보 민주당 공천 때에 표면화되었다. 신파측에서는 나를 입후보로 주장해 잠시 주도권을 위요(圍繞)한 논란이 있었다.

 민주당 내의 신‧구는 자전차의 앞뒤 바퀴와 같은 처지였다. 두 바퀴가 협조해야만 자전차는 한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 박사와 나는 꼭 일치된 뱡향으로 굴러가지 않았다. 사전에 협조를 위한 결정을 못 보고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나는 부통령의 지명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대통령 입후보에 지명받는 것이 곧 민주당의 주도권을 잡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대통령 입후보 지명을 위해 민주당 전당 대회가 개최되던 날 아침, 동아 일보 1면 톱에는 특호 활자로 구파가 100표 이상의 차이로 절대적인 승리를 할 것이라는 보도를 하였다. 이것은 순전히 사전에 구파에게 유리하도록 영향을 주자는 신문사의 의도였다.

 
개표 결과는 484대 481의 단 3표 차이로 조 박사가 지명되었다. 겨우 한 표 과반수였다. 근소한 차이로 지명된 조 박사는 미안한 심정에서인지 지명을 수락할 수 없다는 뜻을 표명했다. 그때 나는 “한 표가 더 많아도 조 박사가 다수결로 지명받았으니 수락해야 됩니다. 나는 그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 협력해서 일합시다. 나는 부통령 입후보 지명을 기꺼이 받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조 박사는 마지못해 이를 수락했다.

159년 10월 26일 민주당 정·부통령 지명대회 후 대통령 후보 지명자 조병옥 박사와 함께



 

 첫날의 당 대회에서는 정‧부통령 지명으로 끝났고, 이틀 후에는 대표 최고 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다. 민주당 다수인 대표 최고 위원도 구파측에서 겸점(兼占)하려는 의도였으나, 이날의 선출에서는 조 박사가 70여 표의 차이로 패하게 되어 내가 대표 최고 의원직을 맡게 되었다.

 
이후에는 신‧구가 합심하여 팀워크를 이루고 대여 투쟁에 몰두할 태세였다.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예정보다 이르게 실시됐다.

 
조기 선거에 대한 문제를 둘러싸고 여야간에 논란이 많았으나, 정략에 의해 조기 선거를 계획한 여(與)의 의도가 관철되었다. 마침 유석(維石)이 미국에 치료받으러 간 사이에 3월 15일로 결정이 났다.


신병 치료차 도미하는 조병옥 대통령 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