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통령에 당선된 후에 받은 구박과 설움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8월 15일에 있은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내외 귀빈을 소개하던 이 박사가 그 좌석의 말단까지 모두 소개하면서도 부통령인 내 소개는 빼놓았다.
남산의 국회 의사당 기공식에 내외 귀빈들의 좌석은 모두 준비되었는데 부통령에게는 청첩까지 보내고도 막상 가 보니 좌석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시청 앞에서 부통령 공판까지의 도로 포장만 제외되는가 하면, 외국 귀빈들의 부통령 면회는 여러 가지로 방해까지 하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고, 아시아 반공 연맹 회의 때 왔던 외빈들이 나를 예방하려 할 때에 관례적으로 제공해 주기로 된 자동차도 내주지 않아, 그들이 스스로 자동차를 구하거나, 호텔에서 순화동 공관 까지 걸어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나마 부통령 공관에 드나드는 사람을 일일이 감시하고 귀찮게 굴어, 내 친척들마저 출입에 큰 곤란을 당했다.
부통령 취임식장에서
1956년 8월 15일에 제3대 부통령으로 취임하여 이름만의 부통령직을 지낸 지 43일 되던 9월 29일, 제2차 민주당 전당 대회가 시공관에서 개최되었다. 전당 대회가 거의 끝날 무렵인 오후 2시 38분 단상으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던 나는 돌연한 총성과 더불어 왼손에 총탄을 맞았다.
순간이 피해 준 위기 일발이었다. 천우 신조로 명을 잇게 되었다.
저격 직후.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비서관 이성모.
대통령이 유사 시에는 부통령이 그 잔여 임기를 계승하는 법체제 밑에서 더구나 고령의 이 박사가 불시에 어떤 액(厄)을 당할까 염려하던 자유당 간부들에게는 부통령인 내가 ‘눈의 가시’였음에 틀림없다.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데, 더구나 한 나라의 부통령을 살해하는 일이 하루아침, 한 사람에 의해 정해지기는 힘들다. 사전에 내가 모종의 정보를 통해 나를 제거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떠한 방법으로 나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의 가시인 나를 저들이 없애려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전당 대회에 참석하면서도 신변 문제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부통령에 당선된 후, 나의 당선을 위해 천신 만고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운동에 힘써 준 전 당원이 모인 자리에 인사를 위해서도 참석치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 기회를 틈타 마침내 내게 총격을 가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왼손에 상처를 입었을 뿐 생명엔 이상이 없었다. 하수인 김상붕(金相鵬)은 총을 쏘자마자 조병옥 박사 만세를 부르고, 주머니에는 해공 선생의 사진을 지니고 있는 등, 마치 구파에서 이런 일들을 꾸민 것처럼 가장해 보려는 넌센스까지 연출해 보였다. 사건 발생 후 5분도 못 되어 치안국장 김종원(金宗元)이 뛰어왔다. 당시 이익흥(李益興) 내무 장관은 어디에 갔는지 없다고 하며 자기가 대신 왔다는 것이다. 응급 치료를 받고 즉시 집으로 돌아갔는데, 30분도 못 되어 이번에는 이기붕 씨가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저격을 당한 나를 위로하러 온 것은 감사했지만 어딘가 조작된 각본 같아서 불쾌했다. 내가 천연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만송(晩松)에게 “여보시오, 정치라는 건 이렇게 해야 한단 말이오?” 하고 쏘아붙였더니, 그는 잠시 아무 말도 못했다. 평소 같으면 여유 있는 농담으로 이 말을 받아넘겼을 것이다.
만송은 한참만에 “장 박사,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이렇게 겨우 얼버무리는 그의 얼굴은 어쩐 셈인지 몹시도 창백했다. 한마디로 제대로 할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워낙 다급했던지 변명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저격을 받고 난 나의 심경은 담담한 것이었다. 이왕 각오한 바를 당했으니 올 것이 왔나보다 하였을 뿐이다. 세상에서 떠든 대로 사건은 매우 복잡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당시 저격을 받은 나로서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늘어놓아야 하며, 또 그럴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회고하건데, 나의 부통령 생활 4년은 죄없는 죄인의 생활을 상기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부통령 공관은 쉬지 않고 관의 감시를 받는 실정이었다. 야당 출신 부통령으로서의 구박과 천대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순화동 공관에 감금된 정부 요인이라는 아이러니를 뼈에 새기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요시찰 제1호에 해당되는 취급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부통령의 동정을 감시하기를 계속했다. 함부로 나를 찾아보러 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대개가 다음날 사복 경찰의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집 앞에 세워 두었던 자가용의 넘버가 그들의 수첩에 기록됨은 물론 심지어 내 비서까지도 “누구냐? 무슨 일로 갔었느냐?”는 따위의 봉변을 당했다.
공관 앞 구멍 가게에 형사를 잠복시켜 항시 동정을 감시할 뿐 아니라 공관의 전화도 도청되었다. 이 생활은 문자 그대로 죄없는 죄수 생활이었다.
정당 관계 인사들과 국회 의원들이 떳떳이 방문하는 이외에는 친척들도 마음놓고 찾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나와 친지 관계에 있는 월남의 고딘 디엠 대통령이 방한할 때만 해도 서울 장안이 들끓도록 환영이 벌어지고 대통령 관저에서는 공식 환영 만찬회가 베풀어지는데도 부통령만은 쏙 빼놓고 얼씬도 못하게 하니, 이것이 과연 타국의 원수에 대한 예의인지 알고도 모를 일이다. 고딘 대통령은 내게 줄 선물까지 준비해 가지고 왔으나 이를 수교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여 부득이 제3자에게 전달을 부탁하고 그만 섭섭하게 떠났다.
후진국 정치인에게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이 괴로운 죄수 생활을 자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력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야만적인 처사였으며 정적을 억압하려는 비굴한 수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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