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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Ⅱ. 부통령 시절 - '못살겠다 갈아 보자'

 국민의 열렬한 호응과 지지를 받으면서 탄생한 민주당은 이듬해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를 맞았다. 창당한지 얼마 안되는 민주당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중앙과 지방 조직을 서두르게 되었다.


부통령 후보 장면의 홍보 전단



 이 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반드시 야당인 민주당이 승리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의 애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커다란 당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소요되는 경비도 큰 문제였거니와 자유당 정권의 구박과 악착 같은 박해를 받아가며 선거 운동에 나서기란 기적을 바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정권을 교체해야겠다는 생각은 우리의 철석 같은 신념이었다.

 
‘못살겠다 갈아 보자’는 민주당의 이 구호는 바로 민심 그대로의 표현으로서 국민의 공감을 얻게 되었다.


못살겠다 갈아 보자 - 1

못살겠다 갈아 보자 - 2

못살겠다 갈아 보자 - 3



 이때, 민주당이 내걸 표어를 정하기 위해 당내에서 이를 모집했다. 응모작이 무려 백여 개 나왔고, 그중 가작(佳作) 10여 개를 예심하여 중앙 상임 위원회에서 최종 투표로 결정하게 되었는데 이 투표에 당선된 것이 바로 ‘못살겠다 갈아 보자’였다. 아마도 조재천(曺在千) 민주당 대변인의 머리에서 나온 모양인데 이것이 바로 민심의 꾸밈없는 표현이었다. 이 표어에 대한 열화와 같은 국민의 인기가 그것을 말해 주었다. 자유당측에서는 이 표어에 대해서 심한 반발을 보이기도 했다.

 민주당을 지지했던 일반 국민들의 호응이 누구의 시킴이거나 사주가 아님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지마는 왜 민심이 민주당과 함께 있었는가는 새삼스레 물을 필요조차 없다.

 
거창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부산 정치 파동, 발췌 개헌안, 중석불 사건, 김성주(金聖柱) 사건, 사사 오입, 국회 불온 문서 투입 사건, 갖은 언론 탄압과 폐간, 국방부 원면 사건 등 정부 수립 후 7년 간의 대부분의 큰 사건은 모두 국민의 의혹을 샀고 흑막 속에 배후가 감추어졌다.

 
추잡한 사건이 겹칠 때마다 실정이 거듭되고 독재가 창궐했으며, 이와 함께 민심은 정부에서 멀어져 갔다.

 
전국민의 호응을 얻어 악착 같은 금력과 관권에 필사적으로 대항하면서 승리를 위하여 전력을 기울였다.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민주당 입후보로 출마하였던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선생과 함께 선거 유세로 전국을 순회할 때에는 가는 곳마다 관력의 압박과 국민의 지지를 함께 받았다.

 
서울 시내의 수송 국민 학교와 한강 백사장에 운집했던 인파는 공전 절후(空前絶後)의 기록을 남긴 것이다. 한강 백사장에서 해공 선생과 내가 선거 연설을 하던 날은 서울 장안이 텅 빈 것 같았다. 무려 30만 이상의 청중이다.

제2차 민주당 서울지역 정견발표회장인 한강 백사장에 모여든 인파들



 차를 타고 한강으로 나갈 때에 인파는 한강을 향하여 굽이쳤다. 곳곳에서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의 압력이 있었으나 민심을 막을 길은 없었다. 한강에 모여든 인파를 보며 해공은 내게 말했다.

 “자 이것 좀 보시오, 이것이 민심이지 뭐요. 어디 민심이 따로 있소. 이것은 천심이요. 누가 오라고 해서 이렇게 모였겠소?”

 
선거 연설을 마치고 해공 선생과 함께 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올 때 장안이 모두 빈 것 같았으며 그때도 사람들은 한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중요 도시에서 선거 유세를 할 때에는 꼭 해공 선생과 함께 다녔다. 이때 받은 설움과 박해를 어찌 글과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여하튼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 모였던 군중의 수는 민심의 소재를 그대로 말해 준 것이다.

 
해공 선생과 나, 그리고 당 대변인 조재천(曺在千) 씨는 5월 4일 밤 10시, 호남 지방 선거 유세를 위해 비서와 경호원 몇 사람을 대동하고 호남선 침대차를 탔다.

 
5월 5일 전주와 이리에서 선거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액운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