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정황 속에서 1951년 11월 파리에서 제6차 유엔 총회가 개최되었다. 수석 대표 선정이 논의되다가 결국은 내가 대표단을 인솔하고 파리로 가게 되었다.
“대한 민국을 새로 수립하고 유엔의 승인을 받을 때에도 임자가 활약했고, 유엔 사정에도 다른 사람보다 정통하니, 이번에도 국무 총리 현직을 가진 채 수석 대표로 유엔 총회에 참석하라”는 이 대통령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다. 나도 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서 건강은 좋지 않았으나, 일행과 함께 파리로 떠나게 되었다. 10월이었다.
파리에 도착하여 2개월 간 머무르는 동안 나는 간염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와병 속에서 동행했던 대표들과 매일 협의하여 유엔 활동을 계속했으나, 불행히도 6차 유엔 총회에서는 한국 문제가 상정되지 못한 채 폐회하고 말았다. 이 회기에는 세계에 복잡한 문제들이 많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유엔 총회가 끝난 후에도 간염이 악화되어 휴양을 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과 귀국이 지연될 것을 이 박사에게 보고했더니, ‘즉시 귀국하라’는 명령이 돌아왔다.
이때에 국내에서는 정치 파동이 일어나 정국이 혼란했던 것이다. 내각 책임제 개헌안이 제출되고, 국회 의원 소환과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땃벌떼’, ‘백골단’의 난동, 발췌 개헌안(拔萃改憲案)의 통과 등, 국내가 혼란의 와중에 있을 때 나는 파리의 병원에 있었다.
본국에서의 귀국 독촉도 있었고, 나 자신의 생각도 국내가 혼란 속에 말려들었는데, 책임 있는 사람이 누워만 있을 수 없어 귀국하기로 했다.
귀국 도중 동경에 잠시 들렀을 때 주미 대사 현직으로 한일 예비 회담 수석 대표로 일본에 와 있던 양유찬(梁裕燦) 씨를 만났다. 그때 주한 미 8군 사령관으로 있던 릿찌웨이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일본에 있었는데 전부터 아는 처지라 양 대사(梁大使)와 함께 인사차 장군을 예방하게 되었다.
내 병세를 들은 장군이 부산 미군 병원에 입원을 주선해 주어서, 1952년 4월 귀국하여 미 육군 병원에 입원했다. 내 병이 중함을 모르고 귀국을 재촉했던 이 박사는 그때 이의 없이 사표를 수리해 주었었다.
이 시기를 둘러싸고 항간에서는 사실과 어긋난 억측과 소문이 떠돈 것 같다. 내가 ‘미군 병원선에 피신해 있다’는 소문은 도를 넘어 귀국 후 이 대통령을 만나지도 않고 병원선으로 피신했다고, 일부러 악선전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귀국 시에 비행장에 내린 나는 총리 서리로 있던 허정(許政) 씨와 함께 바로 대통령을 만나 귀국 보고를 하였고, 그 후 국무 회의와 국회에서 경과 보고를 한 후 기자 회견도 끝내고 장기 치료를 요한다는 미군의 진단을 대통령에게 제시하고 그 동의를 얻어 미군 병원에 입원한 후 며칠만인 4월 19일 사표를 제출했던 것이다.
도대체 병원선엔 가 본 일이 없다.
후일, 서독 병원으로 사용한 부산에 있는 미 육군 병원에서 4개월 간 치료를 받았다. 외부와는 일체 연락이 없었고 외부인의 출입도 금했다.
이것을 병원선에 피신하여 음모라도 꾸미고 있던 것처럼 억측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병원선에 숨어 사람들을 시켜, 그때 대통령에 또 나서는 이 박사의 낙선 운동을 계획했다니 언어 도단이다.
그때의 국회에는 이 대통령의 재선을 막아야겠다는 것이 지배적 여론이었고, 이를 모를 리 없는 이 박사가 국회의 간접 선거를 피하고, 국민의 직선제를 꾀해 비상 수단을 짜낸 것이다.
이 비상 수단을 실현할 계획으로 장택상(張澤相) 씨를 국무 총리에 임명하고, 이범석(李範奭) 씨를 내무 장관에 앉힌 후, 국회 의원들을 감금하고, 공산당으로 모는 등, 소란이 빚어지고 ‘땃벌떼’가 그야말로 벌떼같이 일어나 국회의 해산을 요구하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 이면이 여하한지는 별문제로 치고, 또한 내가 알 바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배후에 내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것만은 명백히 해두고 싶다. 배후에서 조종했다거나 계획을 꾸몄다는 것은 순전히 억측이다. 내가 와병 중이었고, 내 건강 상태가 그런 일을 꾸밀 형편도 아니었다.
그 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 박사의 의도대로 발췌 개헌에 의한 대통령 직선으로, 그는 소원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누구나 당선되리라고 믿었고 거의 확정되었던 부통령 입후보 이범석(李範奭) 씨를 하루아침에 뒤집어서 엉뚱하게도 함태영(咸台永) 씨를 부통령에 당선시켰다. 이 이면에는 별별 추잡한 얘기가 많다.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 박사는 원내외 자유당의 기반위에서 독재의 튼튼한 기틀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이에 불만인 야당 의원과 국민들의 원성도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켜 무시무시한 공포 분위기 가운데 제2대 국회가 발췌 개헌을 통과시켰으며, 그 후에도 제3대 자유당 국회가 소위 사사 오입(四捨五入) 개헌 파동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하여 민심은 집권층과 더욱 멀어지고, 독재 체제로 줄달음치는 이 정권에 대한 일반 여론은 갈수록 험악해지게 되니 민주주의 앞날은 암담하기만 했다.
이 같은 정국의 불안과 공포에 심한 충격을 받은 재야 세력은 날로 기울어 가는 국정을 좌시만 하고 있을 수 없어 비장한 결심으로 독재 세력에 대항하고자 총집결을 꾀하게 되었다.
“대한 민국을 새로 수립하고 유엔의 승인을 받을 때에도 임자가 활약했고, 유엔 사정에도 다른 사람보다 정통하니, 이번에도 국무 총리 현직을 가진 채 수석 대표로 유엔 총회에 참석하라”는 이 대통령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다. 나도 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서 건강은 좋지 않았으나, 일행과 함께 파리로 떠나게 되었다. 10월이었다.
1951년 11월 20일 제 6차 UN총회 수석대표로 활동시 6·25전쟁 참전국 대표 환영 오찬석상에서 장면 선생. 중앙은 리(Trygv Lee) UN 사무총장
파리에 도착하여 2개월 간 머무르는 동안 나는 간염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와병 속에서 동행했던 대표들과 매일 협의하여 유엔 활동을 계속했으나, 불행히도 6차 유엔 총회에서는 한국 문제가 상정되지 못한 채 폐회하고 말았다. 이 회기에는 세계에 복잡한 문제들이 많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유엔 총회가 끝난 후에도 간염이 악화되어 휴양을 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과 귀국이 지연될 것을 이 박사에게 보고했더니, ‘즉시 귀국하라’는 명령이 돌아왔다.
이때에 국내에서는 정치 파동이 일어나 정국이 혼란했던 것이다. 내각 책임제 개헌안이 제출되고, 국회 의원 소환과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땃벌떼’, ‘백골단’의 난동, 발췌 개헌안(拔萃改憲案)의 통과 등, 국내가 혼란의 와중에 있을 때 나는 파리의 병원에 있었다.
본국에서의 귀국 독촉도 있었고, 나 자신의 생각도 국내가 혼란 속에 말려들었는데, 책임 있는 사람이 누워만 있을 수 없어 귀국하기로 했다.
귀국 도중 동경에 잠시 들렀을 때 주미 대사 현직으로 한일 예비 회담 수석 대표로 일본에 와 있던 양유찬(梁裕燦) 씨를 만났다. 그때 주한 미 8군 사령관으로 있던 릿찌웨이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일본에 있었는데 전부터 아는 처지라 양 대사(梁大使)와 함께 인사차 장군을 예방하게 되었다.
내 병세를 들은 장군이 부산 미군 병원에 입원을 주선해 주어서, 1952년 4월 귀국하여 미 육군 병원에 입원했다. 내 병이 중함을 모르고 귀국을 재촉했던 이 박사는 그때 이의 없이 사표를 수리해 주었었다.
이 시기를 둘러싸고 항간에서는 사실과 어긋난 억측과 소문이 떠돈 것 같다. 내가 ‘미군 병원선에 피신해 있다’는 소문은 도를 넘어 귀국 후 이 대통령을 만나지도 않고 병원선으로 피신했다고, 일부러 악선전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귀국 시에 비행장에 내린 나는 총리 서리로 있던 허정(許政) 씨와 함께 바로 대통령을 만나 귀국 보고를 하였고, 그 후 국무 회의와 국회에서 경과 보고를 한 후 기자 회견도 끝내고 장기 치료를 요한다는 미군의 진단을 대통령에게 제시하고 그 동의를 얻어 미군 병원에 입원한 후 며칠만인 4월 19일 사표를 제출했던 것이다.
도대체 병원선엔 가 본 일이 없다.
후일, 서독 병원으로 사용한 부산에 있는 미 육군 병원에서 4개월 간 치료를 받았다. 외부와는 일체 연락이 없었고 외부인의 출입도 금했다.
이것을 병원선에 피신하여 음모라도 꾸미고 있던 것처럼 억측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병원선에 숨어 사람들을 시켜, 그때 대통령에 또 나서는 이 박사의 낙선 운동을 계획했다니 언어 도단이다.
그때의 국회에는 이 대통령의 재선을 막아야겠다는 것이 지배적 여론이었고, 이를 모를 리 없는 이 박사가 국회의 간접 선거를 피하고, 국민의 직선제를 꾀해 비상 수단을 짜낸 것이다.
이 비상 수단을 실현할 계획으로 장택상(張澤相) 씨를 국무 총리에 임명하고, 이범석(李範奭) 씨를 내무 장관에 앉힌 후, 국회 의원들을 감금하고, 공산당으로 모는 등, 소란이 빚어지고 ‘땃벌떼’가 그야말로 벌떼같이 일어나 국회의 해산을 요구하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 이면이 여하한지는 별문제로 치고, 또한 내가 알 바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배후에 내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것만은 명백히 해두고 싶다. 배후에서 조종했다거나 계획을 꾸몄다는 것은 순전히 억측이다. 내가 와병 중이었고, 내 건강 상태가 그런 일을 꾸밀 형편도 아니었다.
그 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 박사의 의도대로 발췌 개헌에 의한 대통령 직선으로, 그는 소원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누구나 당선되리라고 믿었고 거의 확정되었던 부통령 입후보 이범석(李範奭) 씨를 하루아침에 뒤집어서 엉뚱하게도 함태영(咸台永) 씨를 부통령에 당선시켰다. 이 이면에는 별별 추잡한 얘기가 많다.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 박사는 원내외 자유당의 기반위에서 독재의 튼튼한 기틀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이에 불만인 야당 의원과 국민들의 원성도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켜 무시무시한 공포 분위기 가운데 제2대 국회가 발췌 개헌을 통과시켰으며, 그 후에도 제3대 자유당 국회가 소위 사사 오입(四捨五入) 개헌 파동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하여 민심은 집권층과 더욱 멀어지고, 독재 체제로 줄달음치는 이 정권에 대한 일반 여론은 갈수록 험악해지게 되니 민주주의 앞날은 암담하기만 했다.
이 같은 정국의 불안과 공포에 심한 충격을 받은 재야 세력은 날로 기울어 가는 국정을 좌시만 하고 있을 수 없어 비장한 결심으로 독재 세력에 대항하고자 총집결을 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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