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 채록 · 회고 썸네일형 리스트형 회고 - 민주주의의 희생자 (박순천) 박순천(朴順天, 민중당 대표 최고 위원) 역경을 이겨 낸 위대성 내가 운석 선생님을 처음으로 뵙기는 1948년 5·10 선거, 즉 제헌 국회 총선거 무렵이었다. 그때 시공관에선가 무슨 모임이 있었는데 산회 후 밖에 나오느라니까 “박순천 여사! 저 장면입니다” 하고 자기 소개의 인사를 한다. 사진으로 보아서도 그분이 무척 미남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 대하고 보니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갖춘 분이었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만은 결코 아니다. 그분은 누구나가 공인하는 미남이요 신사였다. “이번에 중앙 중학교에서 선거구민들 앞에서 강연을 하게 됐는데 박 여사께서 보조 강연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분은 내게 그런 부탁을 했다. 나는 벌써 장 박사님을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아끼는.. 더보기 회고 - 완전한 신앙의 인간 (모윤숙) 모윤숙(毛允淑, 여류 시인) 신앙인을 접촉하는 “독립당” 이미 고인이 된 장 박사의 인간상을 되새겨 보자면 해방 후 외교 무대에서 활약하던 시절로 돌아가야 될 것 같다. 1948년 9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 총회에 장면 박사를 수석으로 하여 정일형(鄭一亨), 전규홍(全奎弘), 장기영(張基永), 김우평(金佑坪), 김활란(金活蘭) 씨 등이 우리 나라 대표로 나갔다. 나는 마침 뉴욕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 대통령으로부터 유엔 총회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파리로 달려가 그분들과 합세했다. 내가 도착해 보니 우리 나라가 유엔에서 독립 국가로 정식 승인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중대 문제로 미국과 소련은 벌써부터 심각한 기색을 보여 냉전 아닌 설전의 도가니에서 파리는 떠들썩했다. 소련의 외무 .. 더보기 회고 - 거룩한 평신도 장 요한 (노기남) 노기남(盧基南, 천주교 대주교) 거성은 지다 1966년 6월 4일, 이날은 다만 해마다 맞고 보내는 평범한 날이다.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던 이날은 바야흐로 저물어 가면서 역사상 슬픈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오후 4시 50분, 한 인간의 고귀한 생애가 막을 내렸다. 아니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드디어 생명은 육체에서 떠나고 영혼은 하느님의 곁으로 안주하러 갔다. 요한 장면 박사가 서거한 것이다. 이날 저물어 가는 해를 따라, 한국 가톨릭계에 공헌한 거성이 떨어지고 한국 정계의 굵은 기둥이 꺾이었다. 이래서 평범한 이날은 영원한 슬픈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그와 사귀어 왔던 정치인들은 그의 죽음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평소에 그를 따르던 많은 교인들과 국민들이 그의 부음을 전해 듣고 애통해했다. .. 더보기 회고 - 차원 높은 강자 (김영선) 김영선(金永善, 전 재무부 장관) 운석은 강인(强人)이었다 운석 선생에 대하여 할말은 많으나, 여러 인사들이 많은 말씀을 했을 것으로 알기 때문에 그 중복을 피하는 의미에서 간단히 장 박사의 성격의 일면을 밝혀 볼까 한다. 맨 처음으로 장 박사를 뵙게 된 것은 한국 동란의 전운이 감도는 1951년이었다. 대전에서의 일로 기억된다. 출세한 사람을 찾아 다닌다는 것이 어떤 점에선 영광일 수도 있겠지만, 그때나 이제나 “세도한 사람 찾아 다니지 않는다”는 한국식 사고 방식이라 할까, 선비도라 할까, 그런 교양을 몸에 지니기에 애를 써 왔던 나로서 그것은 좀 의외의 일이었다. 제2대 국회 의원으로 당선되고 6·25를 만나 정부가 부산에 있던 시절의 일인데, 향리 가까이 대전에 들렀다가 선우종원(鮮于宗源) 씨 소.. 더보기 백남익(白南翼) 신부 증언 (파일은 총 3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8분 단위로 나누어져 있으며 'LIST'를 클릭하시면 중간부터 들으실 수 있습니다. 자동으로 재생되니 볼륨을 적절히 조절하시기 바랍니다.) 증언자 : 백남익(白南翼) 신부 채록자 : 장익 주교 일시 : 2000. 12. 23. 장소 : 대전교구 교구청 법원 1940년 3월 9일 제가 혜화동 가톨릭대학에 다니던, 그 당신에는 소신 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는 동성상업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에 동성 상업학교 교장선생님이 장면 박사이었습니다. 장면 박사님한테 제가 배운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수신이라고 해서 오늘로 말하면 교양 과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48년에 처음으로 다시 또 장면 박사님을 가톨릭대학에서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해방이 되어서 이.. 더보기 회고 - 자유의 고귀한 시련 - 곽상훈(郭尙勳, 전 민의원 의장) 자유의 고귀한 시련 - 곽상훈(郭尙勳, 전 민의원 의장) 하늘이 주지 않는 기회 운석(雲石)과 나와는 인천이 동향인지라 나는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그의 춘부장께서는 인천에서 손꼽히는 어른이었고 나는 젊어서부터 그분의 자제인 운석을 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상면하기는 제헌 국회 의원 시절이다. 나는 진작부터 그의 이름을 알고 있기는 했었지만 막상 그를 대하고 보니 훤칠한 인물에 무척 호감이 갔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를 보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한결같았다. 사람은 첫인상이 좋아야 한다고 한다. 아마 운석 같은 이를 두고 말한 것 같다. 제헌 국회 시절에 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는 기생들이 동석한 연회였었다. “장 박사님은 사진에도 미남이신데 사진보다 인물이 더 잘나셨네요.” 기생들이 하는 말이었.. 더보기 강영훈 전 총리 증언 - 7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 동영상으로, 녹취는 블로그 관리자가 직접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괄호 안의 시간은 녹취하지 못한 재생 시간입니다만, 블로그 내 첨부된 동영상은 편집본으로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1시간 3분 20초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재생시간에서 1시간 3분 20여 초를 빼면 됩니다.) 추후 수정의 용이를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허 :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셨었죠? 강 : 예. 허 : 그 때 군사영어학교의 교과목들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강 : 군사영어. 군사영어만 합니다. 허 : 미군하고 어떻게 같이 전술을 같이 하느냐 그런 것도 아니고, 의사소통 가능한 거 여부만 하는 겁니까? 강 : 그렇죠. 허 : 그러니까 미군이 작전을 이렇게.. 더보기 강영훈 전 총리 증언 - 6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 동영상으로, 녹취는 블로그 관리자가 직접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괄호 안의 시간은 녹취하지 못한 재생 시간입니다만, 블로그 내 첨부된 동영상은 편집본으로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39분 40초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재생시간에서 39분 40여 를 빼면 됩니다.) 추후 수정의 용이를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허 : 그리고 그 전에 말씀하셨던 육당선생님에 관한 회고 좀 한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강 : 뭐 회고는 이제 몇가지 분야에서 말씀드리면, 우선 처음에 41년에 학교에 들어갔어요. 예과 2학년에 들어갔는데, 우리가 처음에 가서 인사를 드리니까 우리는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때 내선일체론자니 이런 그게 한참.. 더보기 강영훈 전 총리 증언 - 5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 동영상으로, 녹취는 블로그 관리자가 직접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괄호 안의 시간은 녹취하지 못한 재생 시간입니다만, 블로그 내 첨부된 동영상은 편집본으로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21분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재생시간에서 21분 여를 빼면 됩니다.) 추후 수정의 용이를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허동현 (이하 허) : 2공화국 시절에 관해서 더 말씀해 주실게 있으시면... 강영훈 (이하 강) : 무슨 시절? 허 : 2공화국시절에 대해서.... 강 : 지금 대체로 다 내가 관여했다든가 알고 있는 범위는 얘기를 한 줄 압니다만은, 그 때는 사실 뭐, 사관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군대도 무슨 어떠한 그... 액션을 갖다가 매일같이.. 더보기 강영훈 전 총리 증언 - 4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 동영상으로, 녹취는 블로그 관리자가 직접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괄호 안의 시간은 녹취하지 못한 재생 시간입니다만, 블로그 내 첨부된 동영상은 편집본으로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10초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재생시간에서 10 여 를 빼면 됩니다.) 추후 수정의 용이를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강영훈 (이하 강) : 장면 선생님이 총리가 되셔가지고서 이끌어간 그 당시에 정국을 생각하면서 기억나는 점은, 우선 군부에 관한 관점에서의 말씀은, 그때 가만 보니까 우리 동료를 중에 또는 정계에서의 또 우리 친구들하고 가까운 사람들, 소위 새로운 장면 정권에서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해가지고 활발하게 총리하고 접촉이 있었던 걸로 압니.. 더보기 강영훈 전 총리 증언 - 3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 동영상으로, 녹취는 블로그 관리자가 직접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괄호 안의 시간은 녹취하지 못한 재상 시간입니다만, 블로그 내 첨부된 동영상은 편집본으로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44분 10초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재생시간에서 44분 여를 빼면 됩니다.) 추후 수정의 용이를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허동현 (이하 허) : 그리고 당시 군대내에서 민주당정권에 대해서 일반적인 장교들이나 이런 분들이 어떤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증언을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강영훈 (이하 강) : 4.19학생의거가 일어난 후에 허정임시내각이 3개월동안 있었고 그후에 이제 민주당정권이 들어섰습니다만은, 민주당정권이 들어서면서 소위 신파 구파 .. 더보기 강영훈 전 총리 증언 - 2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 동영상으로, 녹취는 블로그 관리자가 직접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괄호 안의 시간은 녹취하지 못한 재상 시간입니다만, 블로그 내 첨부된 동영상은 편집본으로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22분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재생시간에서 22분을 빼면 됩니다.) 추후 수정의 용이를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허동현 (이하 허) : 예. 그리고 조갑재 기자의 박정희 회고록에 대한 책 나온 거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보면 처남이신 김흥수장군하고 그 때 두분하고 또 몇분이 쿠테타를 반대하는 쪽에 서서 활동하고 있는 걸 저지할려고 하는, 라이언군단장하고 연결돼 있던 걸로 얘기를 해가지고.. 강영훈 (이하 강) : 모르는데... 예컨데... 누구?.. 더보기 강영훈 전 총리 증언 - 1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 동영상으로, 녹취는 블로그 관리자가 직접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괄호 안의 시간은 녹취하지 못한 재생시간입니다만, 블로그 내첨부된 동영상은 편집본으로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10초 정도 차이가 납니다) 추후 수정의 용이를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허동현 (이하 허) : 장면총리를 처음 만나시게 된 게 미국에서 만나시게 된거죠? 강영훈 (이하 강) : 그렇습니다. 허 : 그 때의 그 장총리를 만났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서 얘기를 해 주시겠습니까? 강 : 장총리님을 처음 만난 것은 물론 뉴욕인데 1950년 입니다. 1950년 10월달에 내가 뉴욕엘 갔어요. 뉴욕에 뉴욕 해럴드 트리비언이라는 신문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연례 무.. 더보기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