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 - 불멸의 의지 (이귀영)

이귀영(李貴永, 전 장 박사 경호 책임자)

5·10 총선이 맺어 준 인연


 오랜 경찰 생활을 통해서 가장 뚜렷이 기억에 남고 또 감격과 울분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직한 것은, 장면 박사를 모셨던 3년 남짓한 기간의 일들이었다.

 해방 이듬해에 내가 동대문 경찰서 경무계장으로 근무할 때 그분은 우리 관할인 동성 중학교에 교장으로 계셨다. 그 뒤 종로 경찰서에 전직 중에 5·10 총선거를 맞았다. 당시의 선거 분위기는 살벌했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온갖 폭행과 치상이 횡행하였고 좌익 계열의 책동도 엄청났다. 나는 이런 갖가지 정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하여 동분 서주했다.

 장면 박사는 마침내 관할 지역인 종로구에서 출마하였다. 평소부터 그분을 존경해 오던 나는 그분의 신변 보호에 유달리 신경을 썼다. 내가 바랐던 대로 그분은 당선되었다. 당시엔 경찰이 음모도 하고 유권자에게 압력을 가했다는 말이 있었으나 그것은 전혀 허위 날조된 얘기이다. 다만 우리는 경찰관으로서 신변을 보호해 드린 것뿐이었다. 아무튼 이때를 전후하여 장 박사는 나를 아셨고, 나는 그분의 인품이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25 사변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옮겼을 때 나는 영천에서 근무하였다. 당시 그분은 주미 대사로 계시다가 국무 총리로 인준되어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전쟁으로 야기된 어수선한 정국을 수습하기에 바빴다.

 어느 날 그분에게서 부산으로 오라는 연락이 영천으로 왔다. 가서 뵈니 나를 반기시더니 5·10 총선을 회상하시며 대뜸 경호책을 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장 박사가 총리로 있는 동안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 전국을 발칵 뒤집게 했던 큰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 잠시도 그분 곁을 떠날 수 없었다가, 가정 사정으로 경호 책임을 사임하고 일선 경찰서에 다시 근무하였다.

 서울에 와서 부산 정치 파동의 여파로 장 박사의 직계란 레테르 때문에 3년 간 성동서에서 애매한 자리를 지켰으나, 그 뒤 치안국 특수 정보과로 발령을 받았다. 이때 제3대 정·부통령 선거를 맞았다. 해공 선생마저 잃은 그분의 당선을 마음속으로 기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유당에서는 나를 장 박사 직계라고 갖가지 모함을 했으며, 당시 내무 장관인 김형근 씨에게 압력을 가했으나 나의 결백함을 아는 김 장관은 자유당의 압력을 일축했다. 그러나 김 장관은 장 박사가 부통령으로 당선된 선거의 여파 때문인지 내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자유당의 충복으로 유명한 김모(金某)가 치안국장으로 부임하자 나 역시 바로 영등포 소방서장으로 좌천되었다. 나는 사표를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믿지 못할 동직자들


 경찰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고 있던 나는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장 박사가 저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택으로 문병을 갔다. 나를 몹시 반갑게 맞아 주었던 그분은 이튿날 차를 보내 나를 불렀다.

 “같이 또 있으면 어떻겠소?” 하고 내 의사를 물었다. 나는 워낙 자유당에서 미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복직 발령이 날 것 같지도 않고 하여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했다. 그러나 그분은 며칠 동안 차를 보내 와 승낙하기를 재촉했으나 내가 그래도 사양하자 나중에는 화를 내시며 “여보, 내가 이런 데도 같이 있지 않겠소?” 하고 저격당한 손을 내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본의로 거절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몹시 민망하고 송구스러울 뿐더러 저격당하고 난 그분의 심경을 헤아릴 수 있겠기에 복직 발령이 나든 말든 그분 앞에서 승낙하고 말았다.

 한 달쯤 있다가 그분은 나를 불렀다. “발령이 문제요? 뜰 안에 앉아 있기라도 하시오”라고 그분은 하루가 불안하다는 듯이 내게 말했지만, 발령을 받지도 않고 모시는 것은 나로서 곤란하여 발령만 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9월에 상신된 것이 12월에도 소식이 없다가 이듬해 1월 25일에야 비로소 정식 발령이 내렸다.

 국무 총리로 계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야당의 부통령을 모시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항상 매사에 조심성이 앞서야 했다.

 가령 장 박사가 어떤 곳에 갈 때, 해당 경찰서에 사전에 연락을 하는 것이 경호 책임자의 임무이며, 또 응당 그쪽에 경호를 요청해야 할 것이지만 우리는 일체 비밀에 부쳐 사전 통지를 안했다.

 왜냐하면 저격 사건에 경찰이 관련되었다는 것을 안 당시 우리는 비록 동직자(同職者)들이지만, 그러기에 더욱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전에 출발지와 시간을 알렸다가 또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잖는가. 그렇게 통보를 하지 않으니까 관할 경찰서에서는 야단들이었다. 나와 노(盧) 경감은 하는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출발 10분 전이나 아니면 출발과 동시에 연락했다.


악랄한 갖가지 탄압


 이 박사에 의한 자유당의 횡포와 박해는 날로 심각하였다.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 박사가 인사 소개를 하는데 일국의 부통령에 대해서 일언 반구도 없었다는 것과, 남산 야외 음악당 자리에 마련될 뻔한 국회 의사당 기공식에 정식으로 초청되었으나 부통령의 자리가 마련돼 있지 않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심지어는 부통령 관저에 출입하는 사람들까지 모략하여 장 박사를 고립시키려고 애썼다.

 정초에 세배 오는 사람은 으레 민주당원들뿐이고 자유당 인사들은 거의 없었다. 이응준 체신부 장관이 한번 세배를 왔다가 자유당으로부터 맹랑한 모략을 받은 일도 있었다.

 그럴수록 장 박사는 그 울타리 없는 감방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어서 모처럼 오는 방문객들을 접대하기를 매우 즐거워했다. 어느 해 정초에는 전남 광주에서 산다는 고등 학교 학생이 장 박사에게 세배를 드리겠다고 관저를 찾아왔다. 그 학생의 외모가 단정하고 진실해 보여서 장 박사에게 사유를 전했더니 기특한 일이라 하며 들여보내라 하였다.

 “만수 무강하옵소서.”

 학생은 장 박사께 큰절을 하며 만수 무강하기를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게.”

 장 박사는 절을 받으시고 무척 흐뭇해 하며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이 학생은 밖에 나오자 감격한 표정으로 “이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까? 경무대에 가서는 문 밖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그런가 하고 한번 찾아와 보았습니다”라고 내게 말했다.

 그 뒤 그 학생은 자주 서신을 보내 주었다.

 장 박사는 각종 선거 때마다 지방 유세를 가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면 열차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나와 그분은 서로 음식을 바꿔 먹으면서 신변 보호를 할 정도로 우리는 세심한 주의를 했다.

 4대 민의원 선거 때 지방 유세를 떠남에 있어, 정부가 특별 열차를 따로 마련해 줄 아량이 없음을 알고, 다만 일반 열차에 객차 1량만 연결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객차가 모두 지방에 내려가 있다는 거짓 이유로 교통부 장관은 우리의 요청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분은 하는 수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일반 승객들과 혼승하여 유세의 길을 떠났다.

 전북 전주에 도착하여 홈에 들어서는 순간, 역 구내에 있는 전등불이 모조리 꺼졌다. 그분을 마중 나왔던 당원과 시민들은 불을 켜라고 아우성을 쳤으나 불은 끝내 다시 켜지지 않았다.

 지구당에서 미리 마련한 여관으로 가 보니 사복 경관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호위가 아닌 포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지방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중요 도로와 강연장 입구에는 카메라를 멘 괴청년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청중들에게 위협을 주면서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공포와 불안의 분위기를 조성시켰다. 그들이 가진 카메라는 필름이 없는 것이며 또한 필름을 돌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셔터만 마구 누르는 청년도 있었다. 강연장에서는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손짓으로 불러내어 퇴장시킬 뿐 아니라 접근마저 방해했다.

 이를 자세히 보고 받은 장 박사는 이 가증스럽고 악랄한 행위를 청중들에게 폭로하면서 민주주의를 끝까지 사수하겠다고 사자후를 토했다.

 이렇듯 말할 수 없는 유형 무형의 압력과 천대를 받는 나날이었다. 그러기에 지방에 가면 도지사는 코끝도 보이지 않았다. 한번은 전남 지사인 이하영(李夏榮) 씨가 유세차 광주에 간 장 박사를 여관으로 찾아와 부통령에 대한 예우를 지켰다. 그 일로 해서 후에 이 지사는 굉장한 모략과 직위에 대한 위협을 받고 다시는 찾아뵙지 못하도록 했다.

 광주에 도착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장 박사는 역 앞에 대기 중인 차를 타고 강연장으로 먼저 가고 수행원들은 택시를 잡아타고 뒤따랐다. 도중에 파출소 앞을 지나가는데 순경이 차를 세우고 가지 못한다고 갖가지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도대체 정차시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는데 운전수가 내리면서,

 “나는 식구가 7명이나 됩니다”라고 수행원들에게 호소했다. 잘못하다가는 자기 밥줄이 끊어지니 제발 내려 달라는 빛이었다.

 순경의 행위가 자기 본의는 아니란 것은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자유당 시절의 독재와 만행을 새삼 뼈아프게 느꼈다.


항상 부드러우시던 얼굴


 유석 조병옥 박사를 잃은 1960년 3·15 선거전은 독재의 갖가지 압력과 만행의 연속이었지만, 장 박사를 향한 민심만은 누구도 막을 길이 없었다. 장 박사의 인기는 부산 유세 시에 극에 달했다. 그분의 말씀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부산 시민들은 정견 발표장인 학교 운동장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분이 연단에 올라서기도 전에 운동장에는 입추의 여지도 없이 사람이 들어차고 운동장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학교 담 너머의 민가의 지붕에까지 올라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이어서 2월 28일에 대구에 유세를 갔을 때의 일이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분개를 산, 또한 멀리는 4·19의 학생 봉기를 태동케 한 대구 학생 데모가 일어났다. 장 박사의 유세를 간접적으로 방해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그분의 강연을 듣지 못하게 할 비열한 목적으로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를 강요한 데서 야기된 학생 봉기였다.

 그분이 강연장으로 가는데, 분노한 학생들의 데모 대열이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구호를 외치거나 거리를 소란케 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정부에 대해 질서 정연한 무언의 데모를 벌였다. 이를 바라보는 장 박사의 표정은 몹시 심각하였다.

 뒤이은 조치원 유세 날은 마침 장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정작 장터는 빌 정도였다. 그럴수록 당국의 방해 공작은 한층 더 노골화했다. 연단을 중심으로 사면에 커다란 확성기를 장치해 놓고 그분의 열변을 듣지 못하도록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숙소인 여관에는 사복 경관이 경호라는 미명하에 숙박을 같이하여 일체의 바깥 출입을 금지시키려는 심리적 위협을 주었다.

 나는 그분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신변 안전에 나의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과 항상 침식을 같이하다시피 하였던 것이다.

 한번도 내게 언짢은 말씀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 항상 부드럽고 인자한 표정으로 대해 주시던 장 박사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