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증언 · 채록 · 회고

회고 - 교육가로서의 운석 (유동진)

유동진(柳東璡, 전 경전 사장)



일인(日人) 교무 주임을 내쫓은 배짱


 
내가 동성 학교로 교사직을 얻어 가기는 1931년 9월로 기억된다. 당시 장 박사는 서무 주임이었는데, 내가 들어간 해 4월엔가 평양 교구에서 일을 보다가 왔다고 한다.

 
동성 학교는 애초에 염천교 건너 만리동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어물 객주업(魚物客酒業)을 하던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교명을 소의(昭儀) 학교라 했다. 방규환(方奎煥) 씨가 초대 교장으로 들어서면서 ‘소의 상업’이라 고치고, 다시 갑종 상업으로 승격하면서 남대문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남대문 상업이라 했다. 운영 관계로 박준호(朴準鎬) 씨와 의논하여 학교 운영권을 가톨릭 재단으로 넘겼고, 그 후에 동성(東星)으로 개명하여 지금의 혜화동에 옮긴 것이다.

 
학제는 5년제 갑종 상업으로 정원은 60명이었으나 낙제생이 많아 졸업기에는 30명 남짓밖에 안되는 실정이었다.
내가 동성 학교에 갔을 때로 말하면 일인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일인 교사 10여 명에 비해 우리 나라 교사는 서무까지 합해서 겨우 4, 5명 꼴이었다.

 
나는 그때 자연 과학을 담당했었는데 이 밖에도 수학·물리·화학·동식물학 등등 무려 10여 과목이나 담당했었다.
장 박사가 서무 주임으로 들어온 것은 재단 이사측인 가톨릭에서 장차 그분을 교장으로 모실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학교의 교육 방침이나 기타 모든 것은 일인들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었다.

 
서무 주임인 장 박사의 첫인상은 퍽 좋았다. 인물이 어찌나 훤칠하고 용모가 예뻤는지, 나는 고만 반해 버리고 말았다. 더욱이 그때는 30대였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분은 미남인 동시에 존엄성이랄까 근엄성이라 할까, 하여간 내부에서 풍겨 오는 인격이 범인답지 않아 함부로 농을 걸기는커녕 쉽게 접근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휴식 때나 일과가 끝나면, 대개들 장기를 두거나 바둑판에 정신을 쏟거나 아니면 객쩍은 한담으로 시간을 보내기가 일쑤인 우리에 반하여, 장 박사는 성서를 탐독하거나 서무 주임이면서 영어를 가르친 관계로 영어책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자연히 그분을 흠모하게 되고, 음으로 양으로 그분의 인격적인 지도를 받았던 것이다. 박준호 교장이 위암으로 별세하자 교장 서리였던 장 박사가 교장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 박사는 외유 내강만 하다고 하는데, 물론 그분의 성격이 거의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리를 정확히 판단하고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단행하는 분이었다. 당시 동성의 교무 주임은 ‘사이고’라는 일인이었는데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가시였다. 그는 총독부에서 비밀리에 내보내진 사람으로 학교의 운영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 이를 평소부터 못마땅하게 여긴 장 박사는 교장이 되자 그를 학교에서 쫓아 버렸다. 일인 천하에서 더구나 총독부에서 비밀리에 보낸 사람을 한국인이 쫓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총독부 학무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일인 교무 주임을 내보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런 용단이 그분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그분이 결코 외유 내강하지만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느 요리집에서


 
장 박사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 술이라든가 또는 유흥을 전혀 모르는 분이다. 그런데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을 알고 하루는 “요릿집을 가려면 어떻게 해서 가야 되오?” 하고 물었다.

 
교장도 되고 하여 자연히 사회에 눈길을 아니 돌릴 수 없고, 또 상업 학교라 가끔 찾아오는 외국 손님의 접대도 있기 때문에 불가분 그런 곳에 가는 절차라든가 하는 것을 알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요릿집에 가려면 우선 전화로 방을 예약하고, 기생을 지명하여 불러 달라고 부탁을 한 후, 약속 시간에 가면 지정한 기생들이며 모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손님을 맞아들입니다”라고 자세히 설명을 했다.

 
“그럼 나 요릿집 좀 구경하고 싶은데 할 수 있겠소?” 말이 나온 김에 가 보자는 뜻이다. 마침 그때 한창우(韓昌遇) 씨가 장 박사의 후임으로 서무 주임이 되었고, 마침 결혼을 했던 관계로 한씨보고 이 기회에 장가 든 턱을 내라고 했다.

 
우리는 국일관으로 갔다. 장 박사는 본래 술을 못하는 분이라, 술을 조그만 잔에 석 잔밖에 들지 못했다. 그런데 그 석 잔에 탈이 난 것이었다.

 
“여보 유 선생, 이거 보오.” 이튿날 출근한 장 박사는 나에게 얼굴을 보였다. 내가 그분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빨긋빨긋한 것이 돋아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그분에게 술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의외로 하루는 나보고 술집에 가자 했다. 이분이 웬일인가 싶었지만, 당시 동아 일보 편집국장인 함모(咸某) 씨에게 저녁을 대접한다기에 그러마고 했다.

 
“어디를 갈까요?”

 “명월관으로 갑시다.”

 
그분은 선뜻 대답하며 앞장을 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좀 어안이 벙벙해졌다. 왜냐하면 방 예약을 해야 하고, 기생들도 지명해야 하는데 무턱대고 가자고 하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명월관에 도착한 나는 저으기 놀랐다. 전과는 달리 어느 사이에 자기가 미리 다 말을 해둔 것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분은 벌써 기생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었으며, 또 어느 사이엔가 설명희와 김월선 등의 기생과도 다소 숙친한 터였다. 술집에선 으레 장고를 치거나,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뜯으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취흥을 돋구는 법인데, 그분은 아는 기생들을 가까이 불러 앉히고, 남이야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하거나 기생들과 재미나는 얘기의 꽃만 피우는 것이었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의 성품이 달라지는구나 생각했지만, 그분은 절대로 그 이상 덕망을 잃는 짓은 하지 않으셨다. 역시 그분다운 편모였다.


공사 분명한 진실한 교육가


 
장 박사는 이미 독실한 신앙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분일 뿐더러, 교육가로서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분이었다. 당시의 교육가 중에 많은 사람이 좀 불순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지만, 장 박사는 어느 모로 보든지 참된 교육가였다. 재물을 탐내지 않고 지위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음은 역시 인격의 바탕이 된 신앙심에서 우러난 것임이리라.
그분의 교육 방침은 철저한 천주교식이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종교적 신념으로 일해 왔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항상 강조하였다.

 
동성 학교 시절에 매주 1시간씩 종교 시간이 있어 교리를 가르쳤는데, 그것은 그분이 학교에 오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그분이 교장직을 맡으면서부터 학생들로 하여금 교리 시간에 상당한 관심을 갖게 하는 한편 입교에도 힘썼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성을 띤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교과목 외에 1주일에 1시간씩 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장 박사가 교장이 된 후에 학교의 전통을 바꾸었다. 동성의 전통에서 고질적인 것은 도중 전학의 불허였다. 그러나 그분이 교장으로 들어앉자 이 유습을 파기하고 도중 전학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분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일인 ‘사이고’ 교무 주임을 쫓아 버린 것 같은 과단성을 자주 보여주었다.

 
동성은 상업 학교인지라, 이 학교의 대동맥이 되는 것은 상업과임에 틀림없다. 이 상업 과정은 전부 일인들만이 맡아 판치고 있는 속에서 우리 일반 학과와 서무계의 선생들은 장 박사의 뜨겁고 포근한 포옹 아래 살아왔던 것이다.
그분은 공과 사의 구분을 명확히 한 분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전차를 타는 데 있어 전차표 사용에도 공용과 사용의 한계를 분명히 하여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뿐이랴, 그때는 지금과 달라 전차에서 내릴 적에 전차표를 내게 되어 있었다. 만원 전차일 경우엔 그대로 밀려나와 그만 표를 내지 못하는 때도 또한 없지 않았다. 장 박사는 꼭 전차표를 그 자리에서 찢어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신부 대접엔 제자도 가리지 않아


 
사제간의 한계를 초월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스승 된 자는 스승으로, 제자가 된 자는 제자로서의 예의를 갖추게 마련이 아닌가.

 
그런데 장 박사에게는 좀 다른 편모가 있었다. 그분은 교육자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 제자에게 깍듯한 예의를 베풀 때가 있었다. 그것은 그분이 교장 되기 전에도 그랬으며, 엄연히 교장직에 있으면서도 그랬었던 것을 나는 목격했다.

 
장 박사가 교장으로 취임한 후에 많은 신학생들이 교내에 생기는 한편, 타교에서도 그분께 배우고자 숱하게 전학해 왔다.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신학생 3명이 신학을 더 배우고자 로마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 5, 6년 간 신학을 연구하고, 또 성직 생활의 수련을 닦아 신품을 받고 귀국하여 모교를 찾아왔다.

 
그들 신품을 받고 모교를 찾은 제자를 반겨 맞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왜냐하면 동성이 신학교는 아니지만, 여기에서 배출된 인물 중에 그런 사람이 나온 것은 학교의 명예로 보아서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일인 교사들은 ‘기미’ 어쩌고 하여,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자네, 너’ 하고 얘기를 했다.

 
당시 체육 선생인 이모(李某) 씨는 신자이면서도 “어서들 오게” 하고 그들을 맞았다.

 
나는 그때는 신자가 아니었으니 말할 바가 없겠다. 나는 신품을 받은 제자들에게 “여보게 저보게” 하며 말을 함부로 놓았다. 물론 나는 비신자란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자연스럽게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신부님들 오셨습니까.” 교장인 장 박사가 깍듯이 신부로서 접대를 하지 않는가.

 
놀란 것은 나뿐만 아니었다. 주위의 모든 교사들이 크게 경탄해 마지않았다. 우리의 놀람은 곧 장 박사를 경하하는 마음으로 변했다. 그분은 그 제자 신부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스승이요, 교장의 신분이 아닌 평신도로서 신부를 대하는 예의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의 장 박사의 태도에 감복되어 얼마 후에 신도가 되었고, 신도가 된 후에 나도 신부에게 절대로 평어를 쓰지 않고 존경어를 쓰게 되었다.

 
지금 내가 나가는 혜화동 성당의 본당 신부인 유 신부도 우리의 제자이다. 나는 유 신부와는 퍽 가까운 사이라 가끔 농도 하지만, 장 박사는 타계한 그날까지 한결같이 평신도로서 신부의 대우를 했다. 장 박사에게서 본받아야 할 인격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통령 차 타면 무사 통과


 
내가 장 박사의 부통령 비서실장으로 들어간 것은 자유당 말기인 1958년이었다. 전 실장인 성태경(成泰慶) 씨가 국회 의원에 입후보하려고 사퇴하자, 내가 그 뒤에 들어앉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분을 모신 기간은 2년이나 된다.

 
이 2년 간, 아니 내가 모시기 2년 전, 부통령 당시부터 그분은 이 나라의 두 번째 가는 지도자의 직위에 있으면서도 자유당과 이 박사에 의해 갖은 박해와 설움을 받은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순화동 관저는 주야를 불문하고 자유당 모 기관에 의해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민주당 간부 외의 인사들은 장 박사를 뵙고 싶어도 잘 뵐 수 없었고, 간혹 만나고 간 후에는 크거나 작은 화를 당하지 않으면 암암리에 위협을 받았다.

 
따라서 장 박사가 누구를 만나고 싶어도 잘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 사회의 저명 인사를 만나고 싶어하면, 나는 호로를 씌운 지프차를 타고 나가서 모셔와 밖에서 감시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했다. 장 박사의 부통령 생활은 글자 그대로 지독한 감시의 생활이었다. 그분은 늘 불안한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 불안한 생활이 4·19의 민중 봉기로 풀리었다.

 
그러나 전국은 이 박사의 하야를 요구한 데모와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로 한시도 편치 못했다. 더욱이 꽃다운 젊은 학생들의 목숨이 독재의 총알에 쓰러졌다.

 
4월 23일에 장 박사는 부통령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사임했다. 따라서 우리 비서진들도 자연히 그분을 따라 사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25일 대학 교수의 데모가 있던 날, 나는 순화동 관저에 있는 장 박사의 사물을 명륜동 사저로 옮겼다. 당시의 거리는 데모대들에 의해 미어지고 있었다. 지나는 차들은 데모대들이 붙잡아 타고 다녔다.

 
나는 등짐으로 져서 나를 수 없어 부통령의 지프차를 썼다.

 
지나가는 관용 지프차를 보고 데모대들이 가만둘 리 없었다. 그들은 차를 세웠다.

 
“이 차는 뭔데 어디 가는 거요?” 너는 뭐냐는 식으로 따지려 들었다.

 
“이것 부통령 차요.”

 
나는 운전수 옆에서 가슴을 조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앞을 막던 학생들이 길을 터주지 않는가. 그때 다닐 수 있었던 차는 오직 장 박사의 차뿐이었다.

 
이제 장 박사는 가고 없다.

 
돌이켜보건대, 그분은 이 나라 백성들을 자기 몸같이 사랑했고,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기껍게 높이 받들어 모셨다.

 
혼란 속에서도 그분의 차만이 거리에 나다닐 수 있었다는 것이 후세의 사가들에게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