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장면에 대한 엇갈린 평가와 오해 | |
유학·교육운동·정계 진출은 신앙적 ‘소명’ 실현 위한 것 | |
'민족 분단 고착 책임' 비판부터 '5·16 군사 쿠데타 진압 실패' 등 부정적 시각에 대한 재평가 필요 신자로서의 삶·의지 부각시켜야 역사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 시각과 척도를 지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을 명확히 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우석 장면에 대한 그것 또한 세론의 호평과 혹평이 교차하는 평가의 아노미를 보이고 있다. 장면에 대해서는 크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분단 고착화를 야기한 주된 책임자이며 ▲'가톨릭적 배경과 영어 실력' 덕분에 타의에 의해 피동적으로 정계에 진출했고 ▲'강한 결단력과 즉각적 행동이 필요한 상황에서 항상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행동을 일삼다가 ▲민중의 힘에 일어난 4·19 혁명에 편승해 내각 수반에 오른 '항상 수동적이고 자기패배적인 행동 경로'를 취한 무능한 지도자에 불과하며 ▲5·16 군사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한 위기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인물이라고 규정한 시선이 있어 왔다. 그러나 장면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평자들조차 그의 뛰어난 인품이나 그의 치세에 만개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아, 그에 대한 평가에 혼란이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장면의 뛰어난 자질이 정계 진출을 가능하게 한 요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장면은 조국의 복음화를 통해 국가의 민주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뚜렷한 소명의식을 갖고 유학을 단행, 교육운동을 펼치고 나아가 정계에까지 투신한 행보를 보여 왔다. 또 간과할 수 없는 면은 장면이 일부 정치세력에게 이용당한 꼭두각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과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파견을 이끌어낸, 국제 외교무대에서 검증된 지도자라는 점이다. 1952년 유엔 총회 불참으로 우유부단한 정치인으로 치부됐지만, 회의 기간 당시 그가 간염 투병으로 미군 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사실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정치가로서의 자질 시비의 중심인 5·16 군사 쿠데타 진압 실패 주장에 대해서도 각계 연구자들은 한국 사회 자체의 후진성에 기인한 책임 문제를 한 사람의 정치가에게 묻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1948년 당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활동을 민족의 통일을 저해하고 분단을 고착화한 반민족적 행위로 평가하는 부분은 수정돼야 할 부분이다. 이에 대해 허동현 경희대 교수는 "현재 우리 사회가 근대 국민국가 수립과 다원적 민주사회 확립, 효율적 관료제도의 정착, 민간 자율의 경제구조, 평등주의적 사회체제, 합리주의 실용주의 보편화 등을 지향한다면, 이러한 가치와 제도를 한국 사상 최초로 실천하려 했던 장면의 치적과 사상 등에 대한 평가 또한 올바로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장면의 정계 진출은 신자로서의 소명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선택됐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오랜 박해의 경험으로 일제강점기말까지 '정치무관'의 초월주의적 태도를 보여왔으며, 광복을 계기로 민족사에 적극 참여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당시 한국 교회의 사회관은 보편교회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반공주의였다. 평신도 대표로서 장면은 조국의 복음화를 통해 국가의 공산화를 막고 민주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뚜렷한 소명의식을 갖추고 있었다. 장면은 이러한 소명의식을 바탕으로 교회가 제시하는 실천방향에 순명한 인물이었다. 주정아 기자 stella@catholictimes.or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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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9.0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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