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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Ⅲ.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조각의 참담한 진통

총리 인준 후 첫 기자회견 시 기자들에게 둘러 쌓인 장면 국무총리

총리 인준 후 첫 기자회견에서



 국무 총리가 된 후 내게 닥친 어려운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조각에 임하여 특히 큰 고뇌를 맛보았다.

 제2 공화국 초대 내각에 있어서 이번 내각은 내각 책임제하의 첫 내각인 만큼, 각원(閣員) 전원이 똑같은 연대 책임을 지고 생사라도 같이할 동지들의 굳은 단결로 안정 세력을 이룩해야겠다고 생각되어 인물 본위로 엄선하기로 하되, 신‧구 일색으로만 하지 않고 각계를 망라할 계획으로 널리 교섭을 벌여 보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구파 인사들은 신파 총리하에서 생사라도 같이할 동지적 협조의 기색을 보여주지 않았다. 정헌주(鄭憲柱) 씨 한 분만이 우선 동조하여 주었을 뿐이다. 그외 당원이 아닌 외부 인사 중에서 오 문교(吳文敎), 박 농림(朴農林)을 비롯하여, 국방, 법무 차관들도 무소속 인사들을 등용했다.

 
이때,김영선(金永善), 오위영(吳緯泳), 현석호(玄錫虎), 조재천(曺在千), 이상철(李相喆) 씨 등이 밤을 새워 가며 원만한 조각을 위해 노력했다. 대체의 조각 윤곽이 이루어진 후 발표에 앞서 곽상훈 의장에게도 명단을 보내어 그분의 의견을 들은 바 있었다.

 
정권을 쥐지 못한 구파측에서 사사 건건 물고 늘어질 터인데 어떻게 감당해 내겠느냐고 하면서 앞으로 닥칠 당내 분규를 걱정하기도 했다. 나 역시 걱정이 없지는 않았으나 일거에 원만한 해결이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앞으로 기회를 보아가며 다시금 협조의 길을 모색하기로 했다.

 
의중에 꼭 만족할 만한 조각이라고 자부하기에는 다소 부족감도 없지 않았으나, 우선 주어진 조건하에서 최선을 다해 본 것이다. 8월 23일 조각이 완료되어 이를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여기서 참고로 제2 공화국의 초대 내각 맴버를 잠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외무에 정일형(鄭一亨), 내무에 홍익표(洪翼杓), 재무에 김영선(金永善), 법무에 조재천(曺在千), 국방에 현석호(玄錫虎), 문교에 오천석(吳天錫), 농림에 박제환(朴濟煥), 상공에 이태용(李泰鎔), 보사에 신현돈(申鉉燉), 교통에 정헌주(鄭憲柱), 체신에 이상철(李相喆), 부흥에 주요한(朱耀翰), 사무처장에 오위영(吳緯泳), 무임소에 김선태(金善太) 씨 등이다.

 
그해 8월 23일 제1차 내각이 성립된 지 2주일 만에 다시금 내각의 개편이라는 진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으니 딱한 노릇이었다.

 
조각에 불만을 품은 민주당 일부에서는 갖은 압력을 가하다 못해 당의 분열을 꾀하였다. 최초의 내각이 성립된 지 불과 한 주일 만에 구파 인사로 구성된 신민당(新民黨)이라는 것이 원내 교섭 단체의 이름으로 민주당에서 갈라져 나가니 지난날 공동 보조를 취하여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투쟁해 온 나로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구파 인사들과의 개별적인 교섭으로 제2차 내각이 성립되었는데 교통에 박해정(朴海楨), 체신에 조한백(趙漢栢), 보사에 나용균(羅容均), 국방에 권종돈(權鐘敦) 등 4석을 안배하게 된 것이 9월 10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협조를 얻어 보조를 맞추어 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정책상의 이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후에 입각한 4부 장관과도 잘 협력해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충분히 조성되었다. 그러나 밖에서의 심한 잡음이 협조의 길을 막았다. 제1차 조각 시에 정헌주 씨가 구파 인사로 입각되었을 때에도 원내에서의 소란은 대단했다. 정치적인 배신자인 양 규탄하는 태도였다.

 
이런 어지러운 조건하에서 큰 일을 꾸려 가자니 내 고민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구파측에서 4석이나 내준 제2차 내각이 성립된 지 열흘이 못 되어 그들의 반발이 어찌나 심했던지 민주당은 또다시 머리를 앓게 되었다.

 
윤보선 씨 자신의 말을 빌리면 구파에 준 자리가 ‘빈탕’이 아니냐는 것이다.

 
상공이나 재무, 농림 장관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는 불만이다. 솔직한 말로 구파측의 요구는 내각을 순전히 자파 일색으로 하자는 얘기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어째서 국방부와 교통부, 보사부 같은 중요한 직위가 빈탕이란 말인가?

 
더구나 전 각원(全閣員)이 똑같이 공동 책임을 져야 하고, 함께 보조를 맞춰야 하는 내각 책임제에서 부서(部署)의 우열이란 논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만약’이라는 전제를 빌려 김도연 씨가 총리에 인준되어 조각에 임하게 되었다고 가정하면 이만큼이나 신파측에 장관을 배정했을는지가 의문이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협력해서 정치를 해보려는 나의 의도는 좀처럼 이해해 주지 않았다. 구파측 각료들과 개별적으로는 의견의 상충 없이 협력해 국정을 맡게 되었을 때도 밖에서의 잡음은 여전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와해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은 집요하게 계속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