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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Ⅲ.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국무총리 인준 경위

 4‧19 학생 혁명으로 12년 독재의 아성이 무너지고, 제2 공화국을 수립해야 할 무거운 과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야당인 민주당에 의하여 독재와 투쟁하는 민중의 열도가 높아졌고, 부정 선거에 일대 충격을 받은 민주 대열의 선봉인 이 나라 학생들은 생명을 내걸고 불의에 항거하여 잃어버린 민권을 찾는 데 역사적인 기여를 하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우리 야당은 지속적인 대여 투쟁을 통하여 일반 국민에게 안겨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정권이 무너짐과 동시에 개헌을 먼저 하느냐, 총선거를 먼저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논란이 거듭되다가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킨 후 민‧참 양의원 총선거에 들어갔던 것이다.

 
5월 5일 국회에 내각 책임제 개헌안이 제출되어 즉일로 공고되었으며, 6월 15일 이 개헌안의 국회 통과가 공포되었다. 12년 간의 투쟁이 보람을 얻어, 염원이던 내각 책임제도 개헌되고, 7월 19일 제2 공화국의 첫 민‧참 양의원 선거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용산 갑구 민의원 입후보 기호 7번 장면을 알리는 홍보 전단

용산 갑구 민의원 입후보 기호 7번 장면을 알리는 홍보 전단



1960년 7·29 총선 당시의 장면 박사의 유세 모습

1960년 7·29 총선 당시의 유세 모습




 무너진 자유당 정권을 이어받아 새로운 정부를 세울 정당이 민주당밖에 없었음은 일반 여론의 절대적인 뒷받침으로 자명한 사실로 부각되었다.

 
7월 29일에 실시되었던 양원 의원 선거는 비교적 공정하게 시행되었다고 본다. 모측에서 이 선거가 공명 선거가 아니라고 일부 지방의 불상사를 말하지만 이것은 일부 지방에서 자유당계의 출마에 분노한 지방민들의 규탄에 불과한 일들이었다. 사실 12년 간의 독재와 실정을 조금이나마 반성하는 양식이 있다면, 7‧29 선거에서는 자유당계에서 출마하지 않는 것이 정치 도의가 아니었겠는가?

 
7‧29 총선은 예상대로 민주당의 압도적 승리로 끝나고, 8월 8일 제2 공화국의 첫 국회가 개원되어, 참의원 의장에 백낙준(白樂濬) 박사, 민의원 의장에 곽상훈(郭尙勳) 씨가 각각 피선되었다.

 
8월 12일에는 국회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윤보선(尹潽善) 씨가 당선되었다.

 
원내에서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민주당 내에서 대통령과 국무 총리가 선출되어야겠다는 것은 당연한 당론이었고, 이에 따라 당원들이 몇 차례 회합을 가지고 토의한 결과 대통령에 윤보선 씨를 적극적으로 추대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당대 신‧구파 전체의 합으로 제1차 대통령에 윤보선 씨가 당선되었다. 이것은 제2 공화국의 출항과도 같은 것이다. 이제 내각 책임제 헌법 체제하에서 대통령의 임무는 국무 총리를 지명하여 국회의 인준을 받아, 그로 하여금 조각케 하는 일이다.

 
따라서 대통령에 당선된 윤보선 씨의 첫 중대 과업은 물론 총리 지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신‧구파의 잡음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점, 그 책임이야말로 어디 있던 우리는 정치인으로서 국민 앞에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민주당이라는 대여당이 신‧구 양세력으로 구성된 것이 사실인 이상, 어디까지나 대의 명분에 입각하여 대통령이 일을 처리해 나가야 했을 것이다.

 
마땅히 일반 국민의 상식과 정치 도의라는 것을 존중하여 사리에 좇아 총리의 지명이 처리되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제1차 지명에서 국무 총리에 구파 인사인 김도연(金度演) 씨를 지명하여 국회에 통고하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평지 풍파를 초래하는 정치 투석(政治投石)에 틀림없다.

 
구파의 대표자로 우리가 윤씨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일치 단결하여 행동 통일을 한 이상, 그 덕분으로 대통령이 된 윤보선 씨는 응당 신파측과 손을 잡아 국정을 해 나가도록 아량을 가지는 것이 정치 도의인 것이요, 인간의 모럴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의 기대는 아랑곳없이 대통령직과 국무 총리직을 자파에서만 겸점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김도연 씨를 지명하여 놓고 보니, 일반 국민은 물론 당내 신파측의 격분은 걷잡을 수 없이 폭발점으로 달리게 되었다.

 
설사 김도연 씨의 지지가 국회 의원 중에 더 많았다고 치자. 그럴수록 장면을 먼저 지명하여, 내가 국회 인준에서 표를 얻지 못한다면 한층 더 자연스럽게 김도연 씨가 국무 총리가 될 것이니, 얼마나 떳떳한 일이었을 것인가.

 
민주당 전당 대회 때부터 모든 자리를 자파 일색으로 독점하려는 그분들의 생리를 모르는 내가 아니었으나, 김도연 씨의 제1차 지명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이고, 정치 도의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처사라고 새삼 다시 느꼈다.

 
만약 윤 대통령의 의도대로 김씨가 국회에서 인준을 받았다면, 민주당은 일대 혼란에 빠져 수습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했을 것이다.

 
내각 책임제하에서의 대통령은 마땅히 정당을 초월하여 어느 정당이나 파벌에도 가담하지 않고, 초연한 입장에서 국가의 상징으로 점잖게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그러나 제2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은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마치 구파의 참모 본부처럼 쓰고 있어 갖은 정략을 꾸미는 데 제공되었다.

 
신‧구측이 합심하여 대통령으로 추대한 사실에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이라는 태도였다.

 
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원내에서는 내가 먼저 지명되리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으나, 이 예측이 전복되었음은 구파측이 행정부까지를 병점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표시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를 둘러싼 비화가 많으나, 새삼스레 중언 부언하고 싶지 않다.

 
1차 지명에서 인준을 받지 못한 김도연 씨는 자신의 거북한 입장을 생각해서인지, 불만한 심정에서인지 “여당이 너무 비대하면 폐단이 많으니 양단으로 나누어야겠다”고 분당론(分黨論)을 발설하게 되었다. 당을 약화시키는 발언으로 국민 앞에도 떳떳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김도연 씨 다음으로 8월 17일에 내가 지명되어 19일에 근소한 표 차이로 인준을 받아 국무 총리에 취임하였다.

총리 인준 후 윤보선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 국무총리. 왼쪽은 곽상훈 민의원 의장

총리 인준 후 윤보선 대통령과. 왼쪽은 곽상훈 민의원 의장



 
총리에 취임한 나에게는 민주당이 신‧구로 갈라져 세력 다툼하는 가운데서 조각(組閣)이라는 큰 과업을 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