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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장면연구회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과 장면 5 -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립, 결론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립



  한국 경제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개발계획의 수립은 외국기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유엔한국부흥단(UNKRA)은 네이산(Nathan)협회에 용역을 주었는데, 네이산협회에서는 1953년 3월 「한국경제재건계획」(일명 「네이산보고서」)을 발표했다. 한국인에 의한 경제개발계획은 1958년 3월 송인상 부흥부 장관의 발의로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수립 작업이 시작되었다.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장은 부흥부 장관이 당연직 위원장이었으며,  朱源 정위원이 위원장 서리를 맡아 실무작업 책임을 맡았다. 이 위원회에서 「경제개발 7개년계획」의 전반기인 「경제개발 3개년계획(1960~1962)」을 완성한 것이 1959년 3월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계획’ 의미를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의 의미로 오해하여 극히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제개발 3개년계획」이 시작되는 해인 1960년이 4개월이 지난 4월 15일에 이르러서야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다. 그러나 그 조차도 4.19혁명으로 실시되지 못했다.[각주:1] 

 
장면 정권은 출범 직후인 1960년 9월부터 경제개발계획의 시행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미국측의 재정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10월4일 「한국의 경제개혁 비망록」이라는 외교문서를 미국에 수교했다.[각주:2] 장면 정권 하에서도 경제개발계획의 수립 작업은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추진하였다. 그런데 장면 정권의 출범하면서 부흥부 장관은 주요한, 김우평, 태완선으로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차균희 박사는 1959년부터 부흥부 지역사회개발위원회 위원장, 1960년 부흥부 기획국장 등을 역임한 뒤 장면 정권이 성립하면서 부흥부 차관이 되었다. 경제개발계획의 실무를 담당했던 산업개발위원회 책임자는 주원에서 재무부 이재국장을 역임한 바 있는 김종대로 바뀌었다.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으로 새롭게 추가된 사람은 임원택과 홍성유 등이었다.[각주:3]

 1960년 12월 장면 정부는 국회 답변을 통하여 ‘자유당 정부가 수립해 놓은 3개년계획을 7개년 계획으로 연장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는 일방 장기개발계획의 입안과 집행․감독을 전담할 部의 신설을 고려 중에 있다.’고 했다.[각주:4]
이와같이 장면 정부는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을 교체하면서 이승만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수정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 작업결과는 1961년 2월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으로 정리되었다.[각주:5] 이렇게 마련된 계획을 토대로 1961년 3월 내한한 찰스 울프 박사 일행에 대해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을 설명했다. 이 때의 브리핑은 김입삼이 맡았다고 한다. 찰스 울프 박사는 전체적인 찬의를 표하고 특히 민간 부문의 활기가 두드러지다는 점에서 성장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각주:6] 이후 장면 정부는 울프 박사의 견해를 듣고 참작하면서 경제개발계획을 가다듬었다. 이 작업은 4월말쯤에는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장면 국무총리는 1961년 4월 12일 참의원 본회의 답변에서 ‘정부는 외국의 전문가와 연구하여 강력하게 추진할 5개년계획을 세우고 실천이 되면 경제계에 대변모를가져올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하였다.[각주:7] 이것은 4월 중에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거의 완성단계에 도달했으며, 그것의 성공 가능성을 장면 국무총리가 확신하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겠다. 4월말에 경제개발계획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한국측 대표가  5월 9일 미국 워싱턴의 AID를 방문하여 대한원조책임자 캐어리 과장을 만났을 때 경제개발계획안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 때 제출한 계획안은 2월의 「요강」보다 진일보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장면 정부가 수립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문서화되어 1961년 5월 12일 국무회의에 보고되었고, 동일자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부흥부 명의로 발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과 계획의 일부 내용은 당시의 언론에도 보도되었다.[각주:8]  

 
현재 1961년 5월 12일자로 발표된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 원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과 1961년 7월 발표된 군사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과의 구체적 비교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유광호는 1961년 2월 민주당 정권에서 마련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과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비교․분석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 수립요강이 지니는 큰 의의는 3개년 계획서의 약점을 찾아 이를 보완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고, 그 후 군사정부의 경제발전5개년계획의 수립에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수립요강에서는 계획의 목적과 전략, 그리고 계획의 추진 방식 등에서 자유당 정부의 3개년 계획과 차별화를 보이면서 그 후에 등장하는 군사정부의 계획안과 유사성을 보였다. 무엇보다 ‘정부의 계획적 유도’ 등이 강조되면서 과거 ‘균형성장’ 전략에서 점차 ‘불균형 성장 전략’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신호를 보여주고 있다.[각주:9]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에 대한 유광호의 견해는 타당하고 적절한 평가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장면 정권과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유사성에만 주목하고 있다. 오히려 장면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의의는 군사정권의 그것과 차이에 주목할 때 더 분명히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유광호는 장면 정권과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자유경제의 원칙과 정부 역할의 강조라는 점에서 일맥 상통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정부 역할의 구체적 의미에 대해서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장면 정부는 경제계획의 초점을 ‘정부 자체가 직접적인 정책 수단을 보유하는 부문’에 중점을 두고 ‘민간부문의 자발적 활동을 기대하며 이것에 필요한 유도정책’을 취한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군사정권에서는 자유기업원칙을 천명하면서도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추진방식을 채택하였다. ‘유도’와 ‘지도’는 의미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경제계획의 추진 방식과 절차에 있어서의 차이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론


 
장면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 정권은 9개월 정도 존속한 단명의 정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혁명이라는 시대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진력을 다한 정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9개월 동안 장면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의 기조와 구체적 실행을 살펴 볼 때도 확인된다. 장면 정권에서 추진했던 국토개발사업, 경제개발5개년계획 등은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계승되어 시행되었다. 국토종합개발계획, 경제계획원과 건설부 설치 계획 등 장면 정권기에 구상되었던 정책 등은 군사정권에 의해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점은 장면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장면정권이 내세운 ‘경제제일주의’의 시정 방침은 당시의 심각한 경제적 위기의식의 소산이었다. 그리고 ‘질서와 발전’을 내세워 경제적 질서의 확립을 기반으로 한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정책은 경제의 민주주의 원칙을 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장면 정권은 경제정책의 수립에 있어서 다양한 경제 주체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하고 그것을 조정․통합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종합경제회의를 개최하고 중앙경제위원회나 경제계획원과 같은 경제정책 기구를 설치 또는 구상하였다. 그리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구상은 각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산업개발위원회에 맡겼다. 그리하여 경제개발 계획에서도 정부와 민간 부문의 역할 조정에 유의했고, 국토건설사업의 시행은 민관협조 형식으로 추진하였다.

 
장면 정권은 경제 전문 관료 집단의 정책 결정 참여를 고무하고, 민간 부문의 경제 정책 건의를 폭넓게 수용하면서 경제정책을 구상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것은 ‘질서와 발전’을 경제정책의 기조로 채택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이승만 정권의 특권적 경제체제 하에서 잠복해 있던 각계의 경제정책 아이디어들이 자유롭게 개진되고, 이를 비교적 충실하게 수렴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시기에 구상되거나 실시되었던 경제정책이 이후 시대 경제정책의 토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경제적 질서’, 즉 절차와 과정의 민주주의적 원칙을 중시함에 따라 경제정책의 시행과 집행에 있어서 시간적 지체의 문제를 부득이한 한계로 감수하였다.




  1. 주원, 『도시와 함께 국토와 함께』(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1997), 301~309쪽 ; 유광호, 앞의 글, 123~124쪽 ; 김용삼, 「김입삼의 경제개발 비사」, 『월간조선』 1999년 4월호, 410쪽 [본문으로]
  2. 이용원, 이용원, 「제2공화국과 장면」 『대한매일』, 3회, 4회. [본문으로]
  3. 주원, 앞의 책, [본문으로]
  4. 『국회사, 제37회 정기국회』, 5대국회, 114쪽. [본문으로]
  5.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 한국개발연구원 소장. [본문으로]
  6. 이용원, 위의 글, 5회. [본문으로]
  7. 『국회사』, 제38회 국회, 5대 국회, 157쪽. [본문으로]
  8. 「부흥부 발표 1차 5개년계획의 개요」(1961. 5. 12.), 『한국경제 반세기 정책자료집』, 207쪽 ; 조갑제, 위의 글(367회), 『조선일보』 1999년 1월 20일자. [본문으로]
  9. 유광호, 「장면정권기의 경제정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한국현대사의 재인식 5 - 1960년대의 전환적 상황과 장면정권』(오름, 1998), 142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