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1. 민주당 최고위원 시절

운석장면기념사업회 2010. 4. 1. 06:30


 1952년 8월 이 대통령은 발췌개헌에 의해 직선으로 치루어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의도한 대로 다시 당선되었다. 이후 이 대통령은 외생 정당인 자유당을 중심으로 해 독재의 아성을 더욱더 굳건히 쌓아나가기 시작하면서 종신집권의 포석을 놓고 있었다. 1954년 11월 27일에는 “초대 대통령에 한아여 중임(重任)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중심제 개헌안이 재석 203명 중 135명만이 찬성하여 개헌선인 3분의 2선에 이르지 못해 부결되자 이틀 뒤인 29일 사사오입(四捨五入)의 논리를 내세워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의 헌정유린과 폭압통치가 연이어 자행되자 민국당을 비롯한 보수야당 계열은 점차 반독재 투쟁을 위해 힘을 합치기 시작하였다. 1955년 초 민국당과 무소속동지회 소속 의원 60여 명이 원내 교섭단체로 “호헌동지회(護憲同志會)”를 구성·등록하고 그해 9월 19일 민주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운석 선생은 정일형·주4한 등 흥사단계, 오위영 등 원내 자유당계, 현석호 등 자유당 탈당파 등이 중심이 된 신진세력 즉, 신파의 중심인물로서 김성수·신익희·조병옥 등 구 한민당 계열의 재산가나 구미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민국당 계열의 인사들과 연합하여 민주당 창당의 중심역할을 수행하였다.

≪민주당 창당 준비 모임. 대성 빌딩 회의장≫

[손가락을 들고 있는 조병옥과 그 옆자리의 운석 선생. 한근조의 회고에 의하면, 조병옥은 민주당 창당 때 "몹시 장 박사를 칭찬하였다. 장 박사의 인기와 능력을 격찬하는 것이었다. 민주당을 창당하는 데는 어느 누구도 없어도 좋으나, 오직 장 박사만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민주당 창당 과정에서는 운석 선생을 매개로 한 가톨릭 교단의 보이지 않는 원조가 크게 작용하였다. 우선 창당 과정의 산파역이었음을 자부하는 곽상훈의 회상. "이 무렵 운석의 힘이 컸다.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자금 조달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의 가톨릭 세력에 이 때부터 힘입은 바 컸다." 다음은 야당 창당 작업에 참여할 것을 강권했다는 윤형중 신부의 증언. "야당 결성에 나가게 된 것도 다 주위의 권유에 못 이겨 나갔던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교회가 정치에 관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 교회로선 국민을 다스리는 지도자로서 교계의 일도 겸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 덕택에 자유당 시절은 형사들이 쉬지 않고 찾아와 가톨릭 전반을 샅샅이 조사하는 등 법석을 피웠다. 그들은 정치자금이 장 박사에 조달되지 않나 하고 그걸 막고자 발버둥쳤다."]



 

민주당의 대표 최고의원에는 신익희가 피선되었으며, 운석 선생은 조병옥, 곽상훈, 백남훈과 함께 최고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들 중 제헌의회 의장을 지낸 신익희와 내무장관을을 거친 조병옥은 구파였고, 운석 선생과 국회부의장인 곽상훈은 신파였다. 당시 민주당이 표방한 정강은 아래와 같았다.

1. 일체의 독재주의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한다.
2. 공정한 자유선거에 의한 대의(代議)정치와 내각책임제의 구현을 기한다.
3. 자유경제원칙하에 생산을 증강하고 사회정의에 입각한 공정한 분배로서 건전한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하며, 특히 농민 노동자기타 근로대중의 복리향상을 기한다.
4. 민족문화를 육성하며 문화교류를 촉진하여 세계문화의 진전을 공헌함을 기한다.
5. 국력의 신장과 민주우방과의 제휴로써 국토통일과 국제정의의 확립을 기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26개 항의 정책이었다. 이 정책의 골자는 민주주의 정치의 실현, 효율적인 관료제도의 정착, 국가적인 부강의 달성, 국민 소득의 증대,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의 구현, 교육기회의 확충, 인권의 존중, 국제교류의 활성화 등이었다.

 
이러한 정강·정책은 운석 선생이 민주당 창당 식장에서 한 다음과 같은 요지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슬프게도 우리는 정부 수립 후 7년을 지낸 오늘 다시 모여 우리의 헌법이 모독당하였다는 사실을 규탄하고 우리의 민주주의적 포부와 이상을 재확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을 구하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일체의 독재를 배격한다고 정강의 서두에 내걸었다. 우리들은 진실한 민주주의를 살려 나가기 위해 공정한 선거와 내각 책임제를 주장하는 것이며, 관료 정치에 반대하고 관권의 남용을 경계하는 것이며, 관권에 의한 경제권의 침해와 이에 수반되는 모든 부패를 배격하는 것이다.”라고 연설하였다.

≪민주당 당헌(黨憲)≫

[정강, 정책, 선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주당이 자유당의 독재에 맞서 대의 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정강과 정책을 통해 국민들의 심판을 받으려 한 점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달사에 있어 특기할 만한 일이다. 다음은 이에 관한 운석 선생의 회고.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민주당이 독재 정치의 배제가 그 가장 큰 사명이라고 공공연하게 성명한 사실이다. 그 정장 제1조에 '일체의 독재주의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한다'고 명기하였다. 또한 발족 선언문의 1절에는 '한국의 현실은 실질적으로 점차 전제 또는 관료 독재의 방향으로 기울어져가고 있으며, 특히 권력의 과도한 집중과 비민주적 남용에 수반하여 국정의 혼란과 국민의 생활파탄을 가져왔으며, 국위의 손상이 날로 더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정에 대한 책임은 애매모호하여 민주주의 발전의 숙원은 한낱 환상에 끝날 우려가 있다…'라고 밝히며, 한국의 정치 현상을 '독재'라고 지적했다. 이와 같이 독재 운운하며 말할 수 있던 것은 당시 현실로 보아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해냈다는 것은 신당(新黨)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민주당 정강≫



≪민주당 정책≫




 민주당 창당 이후 선생은 1952년 4월 국무총리를 사임한 후 3년간 『경향신문』 고문 등으로 지내온 “재야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이 술회하듯이, “이 때부터 나는 진정한 야당인사가 되어 정부를 견제하고 부정 부패를 저지하는 최일선에 서게” 된 것이었다.

 
한국헌정사에서 민주당 창당이 점하는 역사적 의의는 자유당과 민주당이라는 양대보수정당을 중심으로 교대로 정권을 담당하는 정당정치가 제도화될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물론 민주당은 창당과정에서 조봉암(曹奉岩)으로 대표되는 혁신계의 참여를 배제시켰다는 점에서 보수 우익의 정당임에 틀림없으나, 반공을 국시(國是)로 내건 제1공화국 하에서 좌익정당은 불법화되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바로 이 점에서 민주당은 자유당과 뚜렷한 정치이념의 차이를 찾을 수 없으며, 이 두 보수정당의 경쟁으로 압축되는 정당정치는 사회·경제정책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형태의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의 헌정사를 돌아볼 때 양대 보수정당 중심의 정당정치의 큰 틀은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우리의 특수 현상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한계가 민주당이 한국 민주주의 발달에 끼친 공적을 폄하(貶下)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적어도 민주당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민주주의 정신의 보편화와 민주세력의 성장에 공헌하였다는 한 학자의 평가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비록 정권에 도전할 정도의 체계는 갖추지 못하였다손 치더라도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는 민주당의 부단한 주장과 이를 통한 지지기반의 확대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끼친 공적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민주당은 그들의 정책을 민주주의의 실현에 집중시키고 계속 구체적인 사건과 정치현상에 관련시켜 언급함으로써 초기에 추상적이고 가공적이던 민주주의 개념이 차츰 일반 국민에게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 채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민주당은 국민에 대한 민주주의 계몽과 보급이라는 정당으로서의 기능을 어느 정도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민주당이 안정되고 제도화된 권력행사를 요구하는 계몽된 도서 중산층을 그 지지기반으로 삼고 이를 차츰 확대해 나감으로써 민주세력의 성장을 촉진한 점 역시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공헌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